새벽 일찍 문경으로 향하는 길이 벅차다. 문경 봉암사를 방문하러 갔다. 영주 부석사 이후 문화재 유적(국보, 보물)의 보고이기도 하고, 또한 가고 싶다고 가지는 장소가 아닌 사찰 중의 하나라 설렘이 더하다. 이유인즉, 1년에 딱 한번 부처님 오신 날 (07시~19시)만 개방하기에 당일 아침 인파가 모여들기 전 빨리 가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릇 절구경이란 아침 새벽이슬 맞으며 새소리 물소리와 함께 해야 그 정취가 더하는 법이다. 이름난 웬만한 사찰은 다 가보았지만 이곳 문경 봉암사는 계속 미루어왔다가 드디어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된 날이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영화 '길 위에서'의 배경이 된 영천 은해사 백흥암도 이와 유사한 케이스인데, 여기는 일 년에 딱 두 번 산문을 개방한다. 부처님 오신 날과 백중날이다. 나는 예전 백중날 방문한 적이 있다. 백중(우란분절)은 지옥에 떨어진 조상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재를 올리는 날로써, 불교 5대 명절 중의 하나이다. 백흥암 방문 때는 발상의 전환을 발휘하여 아침이 아닌 늦은 오후쯤을 선택했고 다행히 인파를 잘 피해 갔으나, 백흥암의 백미인 수미단 (보물 제486호)이 있는 극락전을 막 잠그려는 차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하마터면 수미단이 주는 감흥을 받지 못하고 돌아설뻔했다. 아 못 봤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오히려 그런 스릴 있는 타이밍이 감흥의 배가 더하는 짜릿함을 안겨다 준다.
대웅보전 아래서 바라본 봉암사 전경
문경 봉암사의 보물급 문화재로는 일단 국보 제315호인 지증대사 탑비가 있고, 지증대사 탑(보물 제137호),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정진대사 탑(보물 제171호), 정진대사 탑비(보물 제172호), 극락전(보물 제1574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748호)이 있다. 나의 타깃은 국보 제315호 지증대사 탑비다. 국보와 보물 서열(급)을 맞춰 감흥의 깊이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찰(사지)이나 성곽, 궁궐과 왕릉 등의 문화재를 감상하다 보면 그래도 왜 국보인지, 왜 보물인지 그리고 국가 무형문화재, 시도 무형문화재, 문화재 자료 등 서열(급)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나름 느껴진다. 나의 타깃이 된 지증대사 탑비는 국보니 보물이니 하는 문화재의 등급과는 이날 무관하게 이 탑비가 최치원의 4산 비문 중의 하나라서다.
최치원의 4산 비문이란,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 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으로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비(851 이후), 보령 만수산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명(886년 이후),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 비명(893년)을 '사산 비명(四山 碑銘)'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산(山)이란 선종을 뜻하는데, 결국 사산 비문이란 선종 승려 및 사찰에 관한 네 개의 비문이라는 뜻이다.
사회 부조리에 항거하고 혼자 발버둥 치는 은둔 위인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법, 최치원 또한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둔 신라 말의 유학자로서, 사회 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고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 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실패한 또 하나의 개혁 신라인으로 남을 뿐이지만,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류하여,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긴 덕분에 저 4산 비문을 후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증대사 탑비와 탑
오래전 아침 안개 자욱한 날 보령 성주사지를 방문했을 때 최치원의 사산 비명을 알았으며, 그 후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으로 유명한 부여 무량사를 방문 계기로 최치원의 묘가 무량사 뒤편에 존재한다는 설을 접하였으나, 무량사 뒤편에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전설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 오고 역사 기록에 남아 있다는 것은 무량사와 최치원이 무언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문화유적은 역사를 배경으로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혼재되어 서로 얽혀있고 시대를 오가며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는 박제화된 박물관 속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사는 우리들 안에 되살아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역사는 과거에 이미 죽은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나 책을 보거나 읽을 때 감독이나 작가의 이력이나 스토리 주제를 미리 습득하고 볼 때도 있지만 사전적 지식 없이 그냥 볼 때도 있다. 마찬가지로 명승이나 유적, 사지나 성지 등을 방문을 할 때도 이와 유사하다. 그냥 발길 가는 대로 가서 운 좋게 새롭게 얻어가거나, 아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관람 태도에 충실하게 사전 공부를 한 후 방문하여 흐뭇하면 그뿐, 정답은 없는 것이다. 얽매임이 필요 없는 것이 여행이다. 그러나 이번 봉암사 초행길은 후자를 택한다. 왜냐하면 자주 못 오기 때문에 꼼꼼히 봐 두기 위해서이다.
문경 봉암사 초행길의 동선은 아침 07시부터 운영하는 셔틀버스 승차후 내려서 15분~20분쯤 더 걸어가면 봉암사를 맞이하게 된다. 금강산도 식후경 먼저 아침 절밥 공양한 후, 우선 소박한 극락전을 둘러본다. 그리고 대웅보전과 3층 석탑을 둘러본 후, 위로 올라가면 드디어 지증대사 탑과 탑비를 같이 볼 수 있다. 탑과 탑비는 기대만큼 그리 웅장하진 않지만 아담한 규모가 보기에 편하고 세심히 둘러볼 만한 위치라 만족할만하다. 오히려 봉암사의 백미는 기대치 않은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이었다. 물소리와 새소리 이른 아침 햇볕과 어울려 바위에 새긴 마애불을 보면서 좌상 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이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모았고, 실제 좌상 하는 스님 한 두 분 보여서 이곳 봉암사가 왜 수행을 위한 사찰인지 이 마애불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시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셔틀버스 하차 후 봉암사로 향하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일주문을 통과하는 흙길과 내천을 두고 맞은편 길이다. 올라갈 땐 일주문 길을 선택하고, 내려갈 때 맞은편 길을 선택해서 정진대사 탑비를 구경 후 하행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좋았을 건데, 초행이라 반대의 길을 택했다. 다시 온다면 이 동선을 잘 살려서 다음에는 더 좋은 절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른 시간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5월의 햇살이 절 구경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게 해 주었다. 최근 들어 절 구경을 이렇게 기분 좋게 한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한편 문경 봉암사를 나오면서 또 다른 절집이 생각났다.
벚꽃시즌이 끝나면 또 하나의 시즌으로 유명한 사찰인 서산 개심사다. 불과 5~6여 년 전만 해도 활짝 핀 왕벚꽃, 청벚꽃의 생경하고 활기찬 꽃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황홀함마저 가져다주었으나, 주관적인 비교 관점인지는 모르나 요즈음 왕벚꽃 시즌에 개심사를 가면 실망감이 앞선다. 물론 여전히 상왕산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아담한 절집의 정취는 잃진 않고 있으나, 꽃을 보고 있자면 예전의 꽃의 활력과는 사뭇 다르다. 입소문을 타 그사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오기 바쁠 정도로 많은 인파에 꽃이 시달리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서글퍼지기도 한다.
물론 나 또한 그 인파 중에 하나이다. 나는 가끔 무단횡단을 하고 거리에 침을 뱉으면서 그렇게 저렇게 세속에 때 묻어 사는 중생이다. 그런데 모든 중생들이 사진에 꽃을 담으려 꽃을 함부로 만지지는 않는다. 잡아당기지도 않는다. 불행하게 어떤 중생들은 잡아당긴다. 그렇게 시달린 꽃이 몇 년 동안 힘들었나 보다. 분명히 꽃이 예전 같지가 않다. 꽃 보기에 아름다우라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귀엽다고 남의 볼을 잡아당기면 안 되듯이, 꽃도 그렇게 지켜주었음 한다.
아름답지만 내 눈에는 시들해 보이는 개심사 꽃들
'작년 여름에는 여기에서 우연히 주지스님을 만났다. 어떻게 알고 왔냐고 먼저 묻기에 그저 좋아서 자주 다녀간다고 답했다. 그러자 주지스님이 조용히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어디 가서 좋다고 소문내지 말아요. 사람들 몰려들면 개심사도 끝이에요. 사람 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죠?" "예"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다 보니 나는 그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중에서-유홍준)
유홍준 교수가 약속을 못 지킨 것 때문에 사람 떼가 모여들어 원망할 수 있지만 , 그 덕분에 개심사 절집을 알게 되고, 안만큼 보이게 된 점! 세상은 참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문경 봉암사처럼 한두해 아니 필요하다면 여러 해라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개심사 절집 산문을 닫으면 어떨까? 나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해 꽃을 못 보더라도 다시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꽃도 좀 쉬어야 다시 예전의 생생한 꽃으로 탄생되는데 사람 떼가 도와줘야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곧 가능성 없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만 거창한 희망사항은 짧게 하고 그치는 게 상책이다. 지금도 봉암사 절집 산문을 걸어 잠그는 것에 불만이 많은 사람 떼들에 굴하지 않고 지켜가고 있는 봉암사에 만족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