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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May 13. 2019

마포중앙도서관에서

#막장의 등불

이국종은 중증외상환자에게는 의사지만, 현실에 대해서는 힐러가 아니다. 그의 의술은 이 황잡한 세상의 모순, 질곡, 비겁함, 치사함과 더불어 존재하고, 거기에 짓밟히면서 저항하다가 나가떨어지고 다시 일어난다. 그는 현실과 사명 사이에 찡겨 있다. 내 눈에는 그가 중증외상환자처럼 보인다.  (연필로 쓰기- 생명의 막장中에서)

벗들이 속속 집결한다. 시간과 거리 제약 때문에 띄엄띄엄 끼리끼리 만나다가도 이벤트가 터지면 다 같이 얼굴 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벤트가 터졌다. 이번 이벤트 장소는 마포중앙도서관 마중 홀이다. 두 사람 서로가 자신들의 책에서 서로를 언급했다. 느슨한 이러한 인연을 출판사들이 놓칠 리 없다. 책의 먹이사슬은 작가가 쓰고 출판사는 팔고 독자는 사서 읽는 것이라는 단순한 현실과 사명 아래서 먼저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파는 쪽 아닌가 싶다.


이번 이벤트의 주제인 '막장의 등불'은 노(老) 작가의 작품의 경향에서 잘 알 수 있고, 그의 작품을 자주 언급한 골든아워의 기록 (이국종 교수는 자신의 글은 글이 아니라 기록이라 하였다)에 서로는 막장이란 거룩한 공간에서 밝은 빛을 발한다는 취지에서 김훈 작가가 지었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국종 교수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익숙하지 않은 이 짧은 기회에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래 일을 하다 보면 상처가 생기는 법이고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이국종 교수의 상처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자리였다.


연필로 쓰기와 골든아워의 상호관계를 모르는 입장이라면, 질문의 대한 답변의 불일치성 그리고 어쩌면 자제하지 못할 듯한 이교수의 언변에 약간 놀라워할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보고 듣노라면 그의 말속에서 불치의 상처에 대한 치유의 항변과 센치멘탈 해질 필요 없는 현실에 대한 담담함은 뭔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혼자서 짊어지고 가기엔 너무 벅찬, 구원의 무언가의 손길이 김훈 작가로 향하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상처 받는 사람만이 상처의 깊이를 알고 무언가 치유의 손길을 찾게 된다.


그 상처는 다들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제삼자가 그 상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보다 제삼자는 듣고 보고만 있되, 개입하고 싶다면 제삼자는 2인칭의 인칭 변화를 주어야 한다. 상처의 항변은 어떤 식으로든지 아름답지만은 못하다. 아무리 치장하고 미화하고 합리화해도 환영받진 못하며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침묵하기에는 응어리에 맺힌 그 무엇인가로부터 헤쳐 나올 영혼을 영원히 포기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생명에게 짊어가라고 하기엔 너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


무언가 억울함이 쌓이고 공적이 약점으로 변질되면 심적으로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고 그리고 때론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 밥벌이의 대상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사라면 그리 할 수 있을까? 이국종 교수에게 던지는 관객의 질문 중 골든아워가 출간되고 나서 중증외상 센터가 좀 바뀌어가는가의 질문에 이 교수는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세상이 잘 바뀌지는 않잖아요? 하고 오히려 노(老) 작가에게 시니컬하게 되물었다. 이국종 교수의 기록(글)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기편이 많은 자리에서도 이 교수가 외로워 보이는 이유가 그러한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훈 작가는 이 교수의 칼이 부럽다고 했다. 의사가 들고 있는 칼은 진짜 칼이고 자기 들고 있는 연필은 간접적 보조적인 의사 도구이므로 직접적으로 쓰는 칼을 부러워했다. 반면 이국종 교수는 김훈 작가의 연필을 부러워하지 않을까? 때론 쓰기 싫을 땐 연필을 놓아버려도 되지만 칼을 놓아버리는 순간 사람의 생명은 그대로 달아난다.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없는 이 교수 뒤편 김훈 작가가 함께 버티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가 더 많은 중증외상환자들을 살리고 이 사회가 최소한 불의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사회 구성원의 방식으로 정신적 후원이 되어주었음 하고 감히 생각해본다.

나의 벗들도 처음 다들 제삼자로 만났다. 아무런 인위적 행위 없이 관계는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변화하였으며, 반겨주고 위로하고, 때론 맞지 않는 사람과는 다시 3인칭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잊히면서 또 만나며 이어져온다. 강연 시간에 늦게 도착해서 미리 벗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강연 마친 후 참석했냐고 전화를 해주는 벗들도 고마웠고, 차나 한잔 하고 가자는 말에 지하철 시간에 쫓겨 먼저 나와서 아쉬웠지만 서로 주고받는 짧은 덕담에 옛 추억도 생각나게 하는 자리였다.


벗들 속에서, 벗들과 같이 있는데도 한 번 더 두리번거리고 외로움이 스쳐가는 것은 항상 카메라를 들고 와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게 해 준 그 벗은 당연히 안 보여서일 것이다. 당연히 안 보인다는 뜻은 앞으로도 영영 못 볼 것이라는 뜻과 같다. 아마 시간을 되돌려봐도 어떻게 행동했더라도 시간의 차이가 다를 뿐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만 안다. 서툴렀고 지쳐있었고 단호하지 못했다. 나는 중증외상센터의 막중한 위치의 이국종 교수가 아닌 그저 소시민일 뿐이다. 나는 화도 내고, 응어리도 표출해보고, 때론 멘털 뱀파이어처럼 징징대어보기도 한다.


'막장의 등불' 자리는 그 아름답지 못함의 근원을 찾아 위로하고 아름다움을 승화하자는 거룩한 종교적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단지 서로 이해하고 한 번 더 들어주고 오랜만에 찾아준 벗들에게 잘 지내냐고 물어주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소시민을 응원하는 자리다. 만나서 반가웠고 짧은 대화가 서로에게 응원이 되었고 또 되었길 빌어본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 벗의 그리움과 막장의 등불 아래 모든 벗들의 반가움을 뒤로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시간에 쫓겨 지하철을 탔지만 막상 집에 곧장 가기엔 무언가 허전하여 공덕역에서 내렸다. 공덕시장에서 전과 함께 한잔했다. 오랜만에 마신 맥주 한잔이 반가움을 더했고 그리움을 대신했다.


- 2019년 05월 11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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