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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pr 18. 2019

전환(轉換)

몸의 에너지가 다 되었나 보다. 수액을 맞고 영양보충을 해도 회복이 더디다. 몸이 뒤쳐지니 마음도 우울해진다. 속상한 일의 연속이다. 관계 속에서 나오는 피로감도 혼자 속에서 피어나는 고독감도 만사가 귀찮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론가 떠날 수 있지만, 그 마음먹기도 귀찮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전제하에 떠나는 여행이 요즘 그다지 새롭지가 않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화사한 봄날의 경치도 가슴에 와 닿지가 않을 때가 있다.


'일상의 구체성에 바탕한 글, 과장 없이 진솔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읽은 책을 들이대는 건 졸렬하고 게으른 자들이 하는 짓이죠. 선입견에 갇혀있는 글도 못쓴 글이고, 공격받지 않기 위해 안전장치를 빽빽하게 해 놓은 글은 완전히 쓰레기예요'


오래간만에 신간이 나왔다. 신간이 출간되고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서 날 선 비판의 짧은 대목을 인용해봤다.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순신은 정치적 불운과 박해를 백의종군 방식으로 전환시키며, 군사력의 열세에서 수세 그리고 공세로 끊임없이 전환시켰고, 그 전환의 목표를 향해 부대를 이끌고 가서 승리할 수 있는 리더십에 집중을 두는 간결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드문드문 출간한 신간을 통해 흐름의 전환을 완성해 가고 있는 반면, 여전히 독자인 나는 심각하다. 작가가 독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독자가 작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해 흐름이 끊기는 문학적 꼰대를 탈피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작가의 글을 간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선 독자로서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도약이나 성숙과는 다른 전환(轉煥)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365일 쉼 없이 돌아가는 패턴과 그에 대항하는 휴식의 단조로움도 지겨울 때 어떻게 또 삶을 전환시켜 연장할 수 있을까? 이제 좁고 답답한 이 동네길의 익숙함이 넌더리 나고 여전히 똑같은 지겨운 길도 짜증이 난다. 정적인 사람과의 침묵 속에서 온전한 에너지를 받을 땐 한없이 너그럽고 유연해지지만, 어수선하고 논리가 아무리 일관되더라도 날카롭고 시끄러운 사람과의 대화 속에선 같이 예민해지고 나쁜 에너지만 생성된다. 감정의 영역에 서툰 나로서는 날카롭고 민감해지는 날이 더할수록 몸에 축적된 에너지가 쇠약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날은 인파로 북적대는 홍대나 건대입구서 무작정 걷거나 익선동으로 좋아하는 벗들을 소환해 같이하면 기분전환은 될 터인데, 답답한 꼰대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이 좁은 동네가 오늘 유난히 싫다


병원에선 스트레스 탓이란다. 이래저래 스트레스는 편리한 병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환도 요즈음 나의 심리적 전환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책에도 해답이 없다고 작가는 항상 말해왔다. 내부에서는 면역이 떨어지고, 외부에서는 걱정거리에 속상한 소식이 들려오면 잠시 심리조절의 파업을 선언하고 생각의 고리 자체를 끊어버리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고, 벗들의 슬픔을 걱정하고, 관계로 이루어진 모든 연(緣)들의 걱정으로 조마조마하여 소극적인 삶을 살게 되면, 정작 나의 걱정과 나의 아픔은 담담하게 된다.


이해(利害) 관계로 모인 연(緣)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싶어 하는 오지랖 넓은 삶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안전장치를 빽빽이 박아놓고 몇 년 전의 일거수일투족을 상기시키는 증거주의로 일관하는 금세 질려버리는 삶들을 안 보는 방법은 없을까? 그들의 방식대로 대응하기가 너무 싫은데, 자신이 이끌리는 대로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방해하지 않는 삶을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가족들에게 우선하여 다정하게 보듬어주고 챙기는 삶을 살아가면 안 되는 걸까? 일상의 구체성에 바탕하고 과장 없이 진솔한 삶의 토대라면, 의사도 모르는 병의 아픔을 오래 참지 않아도 되고, 피로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5년 전 어제, 그 슬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갈망했고 전환(轉煥)을 소망하였으나, 국면의 전환(轉煥)등 정치적 구호와 악용만 있었을 뿐 변화는 없었다. 죄인이란 죄를 지은 놈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 처벌을 받는 그놈을 의미하는 대한민국에 적용되는 절망의 법칙도 바뀌지 않았고, 기회를 가지지 못한 도둑들은 자신이 선량하다고 하니 그 도둑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윤동주, 병원)의 시구(詩句)처럼, 많은 이들이 의사가 모르는 병으로부터 회복되길 바라며, 또한 나의 건강도 속히 전환되길 기도해 본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속상한 작은 시련도 잘 이겨내리라 희망해본다.

다시 몸에 힘이 빠진다. 수액 맞으러 갈까 보다.

희망으로 전환(轉煥)하고 싶다.

사람세상으로 눈물겹게 전환(轉煥)되고 싶다.


-2019년 04월 17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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