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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pr 07. 2019

YOGA MARGA

아뜨마남 빗디(atmanam viddhi)

올봄 유난히 미세먼지로 인한 고통이 심한 계절이었다. 의사들은 미세먼지는 폐 속에서 걸러지지 않고 혈액에 그대로 녹아내리므로 아직 뚜렷한 치료도 약도 없어 피하면 피할수록 좋다고 한다. 먹고사는 밥벌이터 또한 냉철한 전쟁터라 나쁜 에너지는 미세먼지처럼 무조건 피해야 한다. 승화하여 행복해지는 것은 전쟁터에서 성립되는 말은 아니다. 그 전쟁터의 수장들 중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선장과 유사한 생존본능으로 무장한 장수라도 만나게 되면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근엄하고 친화적인 직장문화를 기대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정신적 공허함을 지탱해주는 요소를 다른 곳에서 펼치거나 갈구하게 되고 그 방법과 대상은 개개인별로 매우 다양하다. 아마 사람들은 그 대상을 단순한 흥미나 관심과 더불어 가치에도 두는 것 같다.


나의 대상은 여행과 문학이다. 여행은 풍광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관광과 축적된 심미안을 통해 감동을 받으려는 답사로 나뉘는데 나의 경우 후자의 비중이 더 크다. 북 콘서트에서 어느 작가는 문학의 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현실의 환기'라고 간단히 답했다. 지겨운 현실을 환기하고, 삶의 지탱하는 새로운 무엇을 찾아야만 또 인생은 한 발짝 나가는 것이다. 유적지와 박물관 유물에 감동과 전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읽고 찾아가고 보고 느낀 그 열성의 보답이며, 덤으로 국내여행안내사와 한국사 자격의 작은 성취감 마처 선사해주었다. 여행과 문학은 갈구하고 흥미를 느껴 스스로 찾고 들어가서 깊은 감동과 짧은 행복을 느낀 반면, 요가는 동기부터 나의 기존의 지적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쩌면 여행과 책은 찾아갔지만 요가는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예전 '낮은 인문학(서울대 교수 8인의 특별한 인생수업)' 이란 책에서 인도 전문가인 강성용 교수 편에 하타요가가 아메리카 대중적 요가의 변천에 관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요가에 관련된 책은 짧게 짧게 접했지 책을 온전히 다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요가 디피카, 요가 수행 디피카, 요가 호흡 디피카는 추천이 아니었다면 아마 찾지 않을 책이었을 것 같다. 왠지 제목과 표지에 종교적인 면이 물씬 담겨있는 듯한 이미지이랄까? 어쨌든 요가 1년 처음 탐독한 책은 요가의 길(오경식 저)이다. 요가의 기원과 배경, 종류, 철학, 분류가 한눈에 파악될 수 있게 요약되어있어 입문자에게 왜 추천하시는지 자연스럽게 읽으면서 체득되는 책이다.


요가의 길(Yoga-marga)을 읽고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요가의 길을 가기 위한 나의 조그마한 태도부터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요가의 길(Yoga-marga)을 입문하는데 크게 두 가지의 마음의 장벽을 인정하고 출발한다. 하나는 무지(avidya)이고 또 하나는 종교적 탈피이다. 이글 처음 미세먼지를 들추어낸 것이 바로 무지의 인식이 다르다는 것, 말로 떠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들어보려 하지도 않는 경우는 내가 미세먼지에 빗대어 보는 입장과 구루(스승)의 입장에서 밥벌이에 지친 나 같은 초보 수련자를 보는 시각이 서로 같으면서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입장에선 미세먼지가 무지이며, 구루 입장에서는 타성적인 나의 요가 수련 자세가 현실적 무지인 것이다.


'요가 또한 자아를 통해 해탈을 이루는 자아를 완성하는 과정이나 결과는 종교와 다를 바가 없고 종교 못지않은 요가마니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긍정과 동시에 경계의 면을 책에서도 표시하고 있다. 나는 여행 중에 가장 우선적인 동선을 잡는 장소가 사찰과 성당이다. 현실 환기와 마음 정화의 최적의 장소로 고요한 사찰과 엄숙한 천주교 성지만 한 곳이 없으며, 종교시설임에 불구하고 오히려 종교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그저 유적지로 와 닿는 느낌이 좋아서이다. 마음의 얽매임이 몹시 싫은 천성이라 선입관 또한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내재되어있나 보다. 오로지 믿음만 강조하는 일련의 행위를 나의 선입관적 종교면이라고 적당히 규정하려 한다. 믿음이란 단어는 왠지 화자 즉, 1인칭과 2인칭 사이 얽매임에서 생성된 수직적 느낌인 반면, 신뢰는 화자와 더불어 3인칭 즉 모든 이들에게 주고받는 수평적으로 와 닿는 느낌의 단어이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극복 또는 타협하면서 조화롭게 날 도약시킬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고 곰곰이 고민해본바, 요가의 길(Yoga-marga)을 기존 관습이나 문학적인 지적 태도로서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색하고, 그렇다고 종교적인 승화를 가지기엔 너무 이질적인 것이라서, 나의 요가의 길(Yoga-marga)은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렵고, 그동안 탐독하지 않았나 보다. 무지의 탈피와 종교의 거부감을 뛰어넘는 지혜의 방법은 철학이다. 저자는 책의 상당 부분을 요가의 실천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 유가와 그에 대항한 많은 사상들 또한 종교적 측면보다 철학이었고 '무지(無知)의 지(知)'를 일깨워주는 역할론에서 철학적 접근이 가장 현실적이다.


요가 철학의 핵심인 아뜨마남 빗디(atmanam viddhi) '자아를 알다'는 아뜨만(atman)을 안다는 것, 즉 깨달음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다르게 표현하자면 , 바로 '무지(無知)의 지(知)-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다'라고 출발하는 것이 무지 탈피의 시작이다. 믿음보다 수평적 단어인 신뢰로 요가를 대하는 평정심이 나의 요가의 길(Yoga-marga)의 솔직함이 아닐까 싶다.


여행과 책, 그리고 행복의 가치에 나를 문득 찾아온 요가!, 이제 내가 요가를 찾아갈 차례다.

야마(yama)에서 사마디(samadhi)의 까지 의식의 확장보다, 자연스럽게 행복을 찾아가는, 그리고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행복의 기원)라는 행복론을 되새기며 찾아갈 차례이다. 내가 만일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노력 없이 찾아온 평온한 기득권 때문이라면, 수련의 지속을 오로지 의지만으로 지탱하기엔 너무 버겁기에, 그저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그 안온한 기득권이 의지와 함께 계속 유지되길 바랄 뿐이다.


나는 요가를 모른다. 철학은 어렵다. 그러나 심각하지 않으려 한다.

실천철학으로서 어려운 요가의 시작을 이제 조금 알았을 뿐이다.


- 2019년 04월 03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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