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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May 25. 2019

내면으로의 여행

요가 수행 디피카(B.K.S 아헹가)

"자유를 지키자, 자유가 나머지를 지킨다!" (빅토르 위고)


요가의 목적은 궁극적인 자유이다. 자유를 언급하기 전 '요가 수행 디피카'의 머리말과 서문을 지나 또 하나의 서문 격인 '내면으로의 여행'에서 언급된 순서를 고찰하며 점진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책 첫 장인 '내면으로의 여행'을 우선 다루어본다. 아래는 우리 몸의 가장 바깥층의 겹(층) 안나마야코사 annamaya kosa의 겹겹이 쌓여있는 층을 나열하고 있으며 코사 kosa(겹) 사이의 분리된 경계선은 없으나, 편의상 분리된 층(겹) kosa 들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1) 육체의 몸 annamaya kosa - 안정감(아사나 Asana)

2) 에너지의 몸, 유기체적인 몸 pranamaya kosa - 생명력(프라나 Prana)

3) 정신의 몸 manomaya kosa - 명료함(마나스 Manas)

4) 지성의 몸 vijnannamaya kosa - 지혜(비즈나나 Vijnana)

5) 신성의 몸, 지복이 넘치는 영혼의 몸 anandamaya kosa - 기쁨(아난다 Ananda)


1)의 몸은 2)의 몸을 거쳐 연결되고 2)의 몸이 3)의 몸과 4)의 몸, 그리고 5)의 몸과 조화되며, 이는 5)의 몸에서 1)의 몸의 겹들 사이 내부(외부)에서 외부(내부)로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즉 요가는 코사 kosa(겹)의 통합과 균형을 이해하는데서 첫출발을 하는 것이며, 자연 prakrti과 영혼 purusa의 존재를 깨닫는 과정의 융합관계를 요가라 설명한다. 여기서 자연 prakrti은 1)의 몸을 포함하며, 즉 1)의 몸에서 출발하여 영혼과 연결 지어주는 여정이 요가란 뜻으로 해석되는데, 1)의 몸은 물리적인 것이므로 늘 변화하지만, 물리적 차원을 벗어난 보편적 실재는 불변하므로 이러한 이원성은 육체를 조정하여 마음을 맞춘다는 것, 다시 말해 개인적 실재를 보편적인 실제로 일치시키다 보면 보편적 실재가 우리 마음에 내재된다는 것이다. 즉 요가의 모든 수행은 프라크르티prakrti와 푸루사 Purusa, 자연과 영혼을 탐구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라고 인식하면 될 것 같다.


a) 외적인 윤리 규율 (야마 yama) - 다섯 가지의 보편적인 도덕률

b) 내적인 계율 준수 (니야마 niyama) - 자기 정화의 다섯 계율

c) 자세 (아사나 asana) - 수련

d) 호흡조절 (쁘라나야마 pranayama) - 호흡의 기술, 생명 또는 우주 에너지의 확대, 확장

e) 감각의 통제 및 철회 (쁘라뜨야하라 pratyahara) -감각을 마음속으로 철회하는 것

f) 집중 (다라나 dharana) - 지속적인 집중의 흐름

g) 명상 (드야나 dhyana)

h) 지극히 행복한 몰입 (사마디 samadhi) - 결합


위는 여덟 개는 요가의 꽃잎을 나열한 것인데 요가를 나의 수학적 나열을 통해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a)~h)의 수행과정에서 1)의 조정을 통해 2)~5)의 코사 kosa로부터 내면에 접촉하고 조화시키는 방법이라 정리해본다. 아마 많은 요가 수련원에서 c)와 d)에 집중되는 점은(엄밀히 말하면 only c) - 요가에 기본에 충실을 강조하는 많은 선생님들의 입장에서 제일 아쉬울 듯하지만- 현실적 시각에서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입장의 차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요가의 대가는 남성이며 여성 체력의 한계성에 절실함을 피력하면, 배우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요가는 여성의 전유물이며 요가의 인식과 인프라는 여성에게 매몰되어있어 극히 불리한 입장이다 라고 서로의 주장이 상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수요와 공급의 현실적 입장 차이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g) 명상은 내가 하는 명상과는 개념이 다르다. 드야나 dhyana는 이미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에서만 가능한 명상인데, a)~f)가 마스트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작정 하는 명상이 드야나 dhyana와는 동일할 순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의 영역이다. 하나의 example만 봐도 전체 맥락이 흐트러지는데 문제제기와 요가를 병행할 순 없으므로, 문명의 활황의 시대에 살고 있는 나의 입장은  a)~h)의 수행을 통해 1)에서 2)~5) 일치시키는 거대담론보단 가장 중요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하되, 원론을 등한시하지 않는 절충점을 찾는 행위가 또 다른 요가가 아닌가 싶다. 배우는 이의 이러한 주관적인 미묘함은 주장이나 이해보단 습득되고 내재된 침묵 속에서 축척되어야만 훼손되지 않기에, 본의 아닌 날카로움을 표출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절제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양극성은 균형을 찾는 것이지 이원성의 대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잘 준수되지 않는 것은 실제 어느 분야든 존재한다. 요가는 자기 중심성이 조금만 무너지면 서로가 크게 상심하고 변질될 수 있는 조심스러운 분야 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종교의 구도자에게서도 서로의 갈등은 내재되는것이 인간사인데 하물며 요가를 가르치는 수련장에서도 마찬가지일듯하다. 뜬금없이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빅토르 위고의 그 자유와 요가의 궁극적인 자유와는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언급한 이유는 같으면서 다른 자유를 하나씩 일치시켜 가고 싶어서이다. 요가 수행 디피카의 다섯 단계를 요가 수련생의 입장과 동시에 독자 입장에서 앞으로 시간 나는 대로 하나하나 풀어가볼려한다.


- 2019년 05월 25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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