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섬에 혼자 있다고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게는 외롭다는 정서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혼자 있을 때 가득 찬 충만감과 편안함을 느껴요. 나의 혼자 있는 것은 쓸쓸한 고독(alone)이 아니라 단독(being alone)입니다'
어느 소설가의 대담에서 들은 말이다. 행복의 기원에서 언급된 'becoming'과 'being'의 차이와 연계하여, 생존적 측면과는 동떨어진 단어인 'alone'이란 주어와 진화론적 행복론에 충실한 'being alone'이란 또 다른 주어, 그리고 편안하다의 서술어로 구성된 역설적 구조의 문장 속에서 행복의 시원(始原)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인용해 본다.
철학, 종교, 문학, 예술 등 가치 추구의 행복을 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은 채 행복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상실하지 않았나 전전긍긍하는 소극적 태도에 갇힐 수 있다는 염려와 생물학적 시각을 토대로 한 행복이 기존 철학적 관념과 가치 추구의 행복론으로부터 완전한 결별은 아닌듯하여, 행복의 기원을 서술어로부터 주어로의 의식의 확장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행복이 자기 체면의 '생각'이 아님을 스스로 찾아보려고 한다.
일단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를 따로 구별함은 행복의 본질에 더 다가서는 전제라는 측면에서 행복론의 명확한 영역을 정의한다. '하기 싫은 것을 안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의 차이는 본질적 행복의 시스템과는 연계할 수 없다는 논리이며, 따라서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로서 변별된다. 책은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과 그 집안 며느리로 살아가는 것의 차이로 이해시키고 있다.
반면 생존본능의 '함께'가 아닌 '홀로'의 개념으로 편안하다는 문장은 대립 구조라 설득력이 감소되나, '단독'이란 주어로 편안하다를 연결하여 하나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구조는 행복의 증가보단 불행의 감소로 더 와 닿는다. 행복의 기원에서 논하는 행복의 범주에 벗어나는 인용문으로 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서술어의 행위로 행복의 시원(始原)으로 거슬로 가자면 '홀로 되는 것' 보다 '단독으로 사는 것'이 불행의 감소보단 행복의 증가로 인식되는 것이 솔직히 더 마음이 편하다. (물론 주관적인 입장이지만)
이런 착각으로 현혹되는 이유가 행복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데 있어 행복의 근원적 출발점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 즉 출발점부터가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이란 점이다. 이러한 사실의 가장 큰 이유가 현실세계의 감각이며, 삶 속에 동반되어 현실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이 의견처럼 받아들여지고 의견이 사실처럼 왜곡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물질만능주의' 이런 쉬운 예를 들면 금방 이해가 된다. 아울러 이러한 왜곡은 행복을 윤리적 측면의 이분법 영역으로 이끌고 가서 다양한 행복의 요소를 대립케 한다.
우리는 양극성의 균형을 찾는 것이지 이원성의 대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홀로'가 생존적 행복에 반(反)한 주어이지만 윤리적으로 어긋난 단어는 아니다. 삶의 태도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며 이는 목적론적 행복과 거의 유사하다. 내면의 가치 추구와 삶의 일부를 부합하는 방향 즉 철학적 동기부여가 작동하게 된다. 이 세상은 재미와 흥미로만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원성의 조화와 균형으로 행복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러한 행위가 '행복해지려는 것'이고 '행복한 것'으로 동기화시키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여기서, 경계해야 할 부분은 '가치 있는 삶'과 '행복한 삶'의 구분이다. 이 또한 개인의 선택이라고 책은 서술하고 있다. 서로를 혼동한다면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여 이질적인 조화의 가면을 덧씌우는 것으로 행복의 기원을 오독한 결과이다. 오히려 행복한 삶과 무지한 삶을 먼저 구분하는 것이 행복의 기원에 집중하며 이원성의 대립이란 난관에 봉착하지 않게 하는 지혜의 밑거름이 된다. 자기가 불행한지 행복한지 그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며 너무 소박한 나머지 단순한 삶이 행복인 듯 자기만의 삶에 갇혀있는 삶부터 우선 배제한 후 행복의 여정으로 출발해야 한다.
질병으로부터 탈피하려 것은 생존적 본능이며, 그 방법론에서 운동치료는 고행에 가깝다. 이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은 최소한 아니다. 반면 건강한 사람이 몸을 만들고자 열심히 운동하는 행위는 생존보단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함이다. 같은 운동이라도 전자와 후자의 동기부여가 다른 이유는 건강이란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며, 생존을 지탱하려 어쩔 수 없는 고행을 하는 것과 생존적 행복을 추구하려 자발적 운동을 하는 것은 서로가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래의 건강으로 회복하려는 것과 건강한 사람이 더 건강해지려고 몸을 만드는 자아실현의 행위는 같지 않다.
행복의 기원을 찾고자 하는 근원적인 지적 태도는 이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현실감각으로 행복의 기원에 근접하려는 역설적 상황이 위에 언급한 'being alone'인 것이다. 구겨지고 초라한 자기만족의 합리화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being alone'의 화해의 측면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상대적 출발점에서부터 좌절한 금수저, 흙수저, N포 세대 등 후기 자본주의의 부조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위로할 수 없을뿐더러, 명확하고 본성에 기인된 간결한 생물학적 행복론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행복이란 단어가 주어로 지배되는 이상, 서술어는 생각과 가치의 범주의 영향을 받는다. 가령 주어가 행복과 관련 없는 또는 반대 개념일지라도, 서술어가 별개의 주어로부터 독립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배려가 스며있는 거리감으로 공존하여야 하며, 이런 화해의 정서는 문장의 불일치의 모순구조도 이해시킬 수 있다. 즉 말의 불일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뜻인데, 이는 조화와 균형의 토대에서 스며 나는 것이다.
좌절하는 삶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항상 삶의 경계면에 존재하면서 결을 형성한다. 이때 결은 칼로 물 베듯이 구분된 게 아니라 하나의 삶 속에 혼재되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유기적 개념이다. 결들의 합치 또는 조화는 가치 있는 삶과 행복한 삶 그리고 불행의 감소, 행복의 증가와 구분하는 논리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역설적 구조의 문장 속에서 행복의 시원(始原)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바로 이론 혼재성의 혼동을 경계하고 싶어 말머리에 언급하였다.
'행복한 것(becoming)'과 '행복해 사는 것(being)'은 다르나 그 시원(始原)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다르듯이 도착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곧장 갈 수도 있지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갈 수도 있다. 그 갈려고 하는 에너지와 의지가 바로 동기부여이다. 그리고 꾸준한 동기부여가 바로 행복이다. 이것은 억지로의 의지와는 구별되며, 자연스러운 생물학적의 정화와 진화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홀로'가 행복하진 않더라도 '단독'으로 만족할 수 있다. '홀로'라는 출발점을 '단독'이란 도착점으로 전환시키는 동기부여가 행복이며, 그러한 행위로 편안하다의 서술어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도착점은 출발점과 화해하고 조화하여야 한다
나의 행복 여정은 '행복의 기원'이란 행복을 정의하고 명제를 풀어놓은 아주 큰 사전을 가지고,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조합하고, 시점과 종점을 조율하며, 주어와 서술어를 조화시켜 균형 있는 삶의 태도로 행복을 바라보려는 것이다. 행복은 억지로 된 '생각'이 아니며, 좀 더 피부로 와 닿고, 더 본질적이며, 더 직접적이다. 그래서 대립하고 반박하고 양극화되기 쉬운 단어이기에 여기에 행복의 시원(始原)의 여정을 거쳐 유연하고 공감하며 현실적인 행복으로 전환시켜 무해한 행복으로 탄생케 하는 것이다.
유해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익한 행복은 소수의 특권이므로 인간을 교만하게 하며 결국 그 행복은 변질된다. 무지에서 벗어난 깨어있는 의식의 확장으로 행복을 맞이하고 싶다. 희망은 증발하기 전까지만 붙잡고 있어야 하며, 때론 희망 없는 순간도 무던히 살아낼 줄 아는 삶, 또 때론 삶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면서도 또 처절하게 살아내야만 할 때, 그런 자동사와 타동사의 서술어가 행복으로 치환하며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무해한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 순식간에 범람하여 금세 소진되는 열정적인 행복보다 편안한 거리감으로 정화된 무해한 행복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결핍으로부터 충만된 온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한 여름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