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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Nov 02. 2019

아몬드

아몬드(손원평)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감정 표현 불능증, 공감능력의 상실 등 고상한 단어를 무색하게 한 예전 우리가 읽었던 '좀머 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속 그 유명한 좀머 씨의 외침이다. 소설 '아몬드'(손원평)를 읽으면서 무심히 문득 좀머 아저씨의 부르짖음이 연상되는 것은 억지로의 관계 맺음도 아니며, 주인공 선윤재 영역을 좀머 아저씨로의 감정이입으로 방향 전환 또한 아니다. 소설 후반부에 밝히듯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종의 하나인 것처럼 '아몬드'와 '좀머씨 이야기'는 그러한 연관이다.


'네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말했더라면 늦지 않았을 거다'라고 펼쳐진 초반부의 감정의 파편들로부터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내가 왜 그런 질책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주인공은 내면에 움튼 감정의 영역이 과연 윤리적 측면으로부터 거리감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의문부터 제기한다. 태연한 세상에 특별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특별한 날에 태연한 척한 것인지는 마치 원래부터 착한 곤이가 세상에 갇혀서 구겨진 것인지, 구겨져서 세상에 갇힌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과 흡사하다.


소설 속 선윤재 영역의 감정의 불능이라 함은 옳고 그름의 선악의 개념에 무뎌진 것보다는 이성적 감정의 호소에 무심한 영역에 더 가깝다. 오히려 범죄의 영역에서 근접하고 전전긍긍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있는 곤이라는 대립적 인물 속에 윤재의 존재를 선악으로부터 무해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무력한 삶 속에 선천적인 심리적 면역을 제공받았다고 착각하고 싶은 주인공은 세상의 시간을 버티지도, 그런다고 자신을 내버려 두지도 않는 삶을 이어가는 것을 생존적 본능에서 느끼는 행복의 감정들을 포기한 대가에 만족하는 듯 그려지고 있다.


윤재의 표현처럼 어떤 이야기가 비극이든 희극이든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고 말하지만, 마찬가지로 예감이란 '그냥 문득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경험의 일이 인과로 머릿속에 차곡히 쌓이듯 소설 후반부 엄마의 깨어남과 주인공의 다짐은 미래에 다가올 사랑과 희망의 울타리 속에서 외면받지 않는 세상과의 관계를 예감한다. 느낌의 불능에 기쁨과 슬픔이 포함되어 있기에 애당초 비극과 희극을 분별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작가는 윤재와 곤이를 좀머씨처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지만은 않는다.


도덕적 관념의 감정에 빗댄 곤이와는 다른, 남의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겉돌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에 능한 도라를 출연시킨 점도 바로 소설이 세상과 사랑으로의 귀결을 암시한다. 도라는 육상이란 매개체로 항상 몸을 움직이며 근육의 활성을 보여주는 것은, 윤재의 이성적 감정의 무능 영역을 노력과 연습으로 도약하여 발휘하라는 암묵적 동력원으로 작동하며 윤재의 감정의 확장을 일으키는 역할로서, 그들을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조화시키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하루 온종일 내내 호수 주위를 맴돌면서 결국 호수 속으로 걸어가는 좀머씨와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붙잡지 못하는 좀머씨 속의 또 다른 나와의 관계 속에서 좀머 아저씨의 내면의 의식을 소극적인 눈으로 투영하여 독자들이 스스로 좀머씨를 바라보게 한다면, 아몬드는 세상에 투영된 감정 불능의 인물과 투명하고 뚜렷하지만 일그러진 또 다른 인물 등을 태연하고 무심한 세상에 편입시키려는 작가의 적극적 의지로 대비된다.


'좀머씨 이야기'는 세상과 주변 인물들과의 암울한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먼발치로 방기 하는듯한 관찰자로서의 의식에 집중한 반면, 교훈적인 질감이 도리어 소설의 내재된 감수성을 훼손하는 또 하나의 비극에 물들지 않으려고 비극적이고 실패한 그러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소설가의 관념적인 본능이라면, '아몬드'는 본능적 배려를 과감히 거부하고 윤재와 그 주변인들을 통해 방치하지 않고 애당초 원래 존재하지 않는 무해한 감정들로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며 희망으로의 길의 물꼬를 적극 터주고 있다.


멀면 먼 대로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으로 나서지 않는 소설 속 세상을, 단지 평범하지만 않은 윤재를 통해 비추고 있는 것은 도리어 타인의 대한 오불관언 (吾不關焉)은 이미 세상 속에 만연된 것이며, 그러한 세상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고 느끼는 것이 진짜라는 역설적인 면을 윤재를 통해 대변하고 있다. 소설은 어쩌면 낯선 세상에 온전하지 않은 주인공과 그 세상에 갇혀 미쳐버린 또 다른 괴물을 대비함으로써 두 소년과 그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실질적인 괴물의 영역인 세상과의 화해로 근접시키려 유도한다. 이는 세상의 아름다움 즉 쉽지 않은 현질적 사랑을 성사시키려는 궁극적인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관계없는 타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타지 않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무심히 고개를 떨군 채 목적 없이 기다리는,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이 가지는, 시선이 닿지 않는 그 외로움이란 곳에서 누군가가 전하는 작은 온기를 그리워하며,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다가와서 내 곁에 앉아주길 바라진 않는 것일까? 계절적 흐름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윤재의 스무 번째 봄날이 우리들의 진정한 첫 번째 봄으로 거듭나길 간곡히 바라본다. 또한 외롭고 간절한 침묵이 흘러가는 감정들 속에 묻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본다. 혹시 좀머 아저씨가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지 마시오'라고 외친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 2019년 늦은 여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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