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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Mar 28. 2020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단순한 인간의 '보편성'이 실제 사람들의 '다양성'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를 두괄식으로 요약하자면 본문의 내용을 인용한 위의 문구로 정리된다. 너무 사회적, 정치적, 문학적, 철학적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다지 고상하지도 퇴락하지도 않는 나의 책 읽기의 태도는 애매모호하기도 하고, 난해한 삶의 화두와 같은 갈등적 구조에 '적극적 조치'로서 성과를 내어야만 하는 강박과 부담을 주는 주제라서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우리네 삶은 명석한 정답보다 해답 풀이과정으로 조화와 균형을 자주 제시한다. '경계가 애매하면 필요 이상으로 서로에게 관여하게 된다. 반대로 경계가 경직되면 서로를 외롭게 만든다 ' (말 그릇 中, 김윤나)

아마 많은 사회 조직과 인간관계에서 동의하는 긍정과 부정의 보편성의 거리일 것인데 조화와 균형의 말 그릇으로 타 책에서 인용해보았다. 작가는 차별의 근원적 구조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를 '무지의 장막'에서 출발시켜 다양성을 보편성에 녹아내리게 한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옹호를 지지한다.  


이러한 옹호가 선동도 무지의 편견이 아니다란 냉철한 관점 하에 그 모든 가능성을 추구하는 작가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루어낸 결과와 이에 자신감과 주관적 개입의 거리로서 독자에게 다가선다. 지식 추구적이고 논리적인 독자의 책 읽기라면, 작가의 주장은 차이와 차별, 주류와 비주류 등의 이등분적 편 가르기 오해로 얼룩진 양비론에 봉착하고 편승하는 맥락의 한계를 날카롭게 반론한 명쾌함에 박수를 보내지만, 또 한편으론 지적 충만감과 동시에 너무 무미건조한 나머지 정서적 따스함의 결핍은 여운으로 남는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책은 읽는 독자의 선제적인 의식에 기반한 책이기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과 비판 의식에 친숙한 닫혀있는 독자에겐 무의미한 책이다. 같은 출발선에서 작가를 자유롭게 내버려 둘 수 있는 관용은 기본이다. 작가가 언급한 토크니즘의 독자의 자격론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이 열려있는 자세로서 접근하는 것은 개인 몫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룰 또한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기본적으로 적용된다. 모름지기 책은 읽는 이 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책이 독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가장 날카로운 시대의식의 주장은 감성적 문학적, 행동철학의 견지에서 읽다 보면 다행히 문맥이 오독되지 않고 주관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이러한 비문학적 서적을 문학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출발점이 상이한 유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과 다양성은 시대 흐름적인 정서를 인정하고 긍정적인 면을 다치지 않게 다루어야 한다는 전제를 강조한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을 고정 인자 없이 유동성과 변동성을 어떻게 합치시키는 문제는, 발상의 전환으로 근접하는 것이 최소한의 저항과 불편함이 없는 접근법이다.


'윤리도덕적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하는 능력은 인간의 능력이다. 이 능력을 기르고 싶다면 철학, 특히 윤리 도덕학과 문학의 융합을 추구하라. (에이트 中, 이지성)' 인공지능 자율주행차에 '트롤리 딜레마'를 적용하는데 한계를 느끼는 것은, 바로 가장 시대 주도적인 측면인 기술도 윤리라는 정서적인 측면에서 주저하는 딜레마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답을 알고 질문을 던지는 것도, 자신만의 답을 구하기 위해 타인을 강요하는 것도, 잘못된 질문이 답을 멀어지게 하는 것은 효율적인 접근도 아니고 더더욱 인문학적 해결책도 아니다.


의식의 흐름의 역할은 자신이 인정하지도, 선호하지도 않아서 몰랐던 해답을 이끌어준다. 이 또한 자아성찰이란 내면의 성숙이 작용하여야만 가능하다. 선량하다와 차별하다의 이중적 단어 속에 무한히 내재되어있는 갈등은 결국 정서적인 가치와 시대의식과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가장 부조화스러운 다양성과 보편성의 충돌 또한 인공지능이 해결할 수 없듯이,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영원한 풀이로서 그 변동성의 하나인 시간과 시대에 좀 더 앞서 빠르게 안착하려고 하는 작가의 선량함은 대중의 의식을 조화롭게 이끌어 낸다.


진보적인 신속함 그리고 명쾌한 과정이 성과를 이루어냈고, 이는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매개임에도 불구하고 반면 선의의 주장과 과정만 매몰될 때 결국 혼란과 분란의 중심에서 대중은 한없이 너그러울 수만은 없는 구성원의 대다수인 우리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극복해야 할 정서적 가치를 굴복과 포기가 배제된 어원으로 풀어낸다. 바이러스로 인한 '사회적 거리'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 '심리적 거리'가 다른 것처럼 불가항력적인 수긍의 침묵과 내재된 잠재력의 묵언과는 다른 것이다.


자아의 의식과 행동 그리고 성찰은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트롤리 딜레마'의 프로그램을 함부로 입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침표에 물음표를 찍는 것이 의식만이 아니듯이, 마침표에 쉼표를 찍을 줄 아는 현명함이 비겁함이 되지 않게 풀어주는 덕목은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에 향한 사회의식을 이끌어가는 집단지성인들 즉 지식인들의 인내와 포용이다. 중립성의 포괄적 배제도 아니며, 차별을 주장하고 그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풀 수 있다는 단계적 메커니즘의 속도의 차이 또한 인정해달라는 대중의 요구에 대한 포용과 인내이다.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책을 읽는 내내 어느 한 에세이 제목에 시달렸다. 비록 정치적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 강하게 학습되고 경험된 선택에 익숙하다. 선의, 악의, 차별, 차이 등과 같은 단어에 선택은 영원불멸이고 또한 선택은 변절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짓누른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러한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책이며 이 책은 아무도 어느 쪽을 묻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런 압박을 느낀다는 것은 아마 나는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로서의 책 독자가 아닐 수도 있으며,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의 중립성으로 은폐한 배제와 억압을 은연중에 묵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은 아닐런지!  대답해야 할 의무를 의식의 흐름 속에 금기어처럼 떠오르게 하고 대신할 그 무엇을 갈망하는 것은 묻지 않는 질문에 대답할 용기가 없거나 인간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완벽함에 대한 서글픔 때문은 아닐까?  미래의 인간은 '트롤리 딜레마'에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2020년 봄이 아닌 것 같은 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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