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Q) 공무도하란 작품에서 강을 기준으로 이곳 현실의 절망과 비극 저곳 강을 건너 희망의 세계가 이분화되어있다면 작가는 강을 건너 이제 희망을 말하는 작품을 쓰고 싶다 하셨는데 장편 '공터에서'도 우울함과 비극이 난무한 느낌인데 희망적인 작품은 언제 쓰실 건가?
작가 A) 있지도 않는 허황된 유토피아를 내세우며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했다. 이념과 심지어 종교까지도, 그런 허황된 희망을 제시하는 것보다 우리는 희망 없는 곳에 살아낼 줄 알아야 한다. 애당초 없는 희망을 만들지 말고 사실적은 객관적으로 살아낼 줄 알아야 한다. 거기서 약자를 보호하고 사람에게 친절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 2017년 5월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직관적 희망은 이번 소설에도 없었다. 마(馬)씨 집안의 비극에서 이제 진짜 말(馬), 야백과 토하가 등장한 이번 소설의 개인적 포커스는 '금'과 '말'이다. 특히 말(言, 馬)은 동음이의어로 함의적 표현의 주된 암시라 여겨진다. 작가는 /뒤에/에서 '이 책은 답답함'의 소산이라고 했다. 솔직히 책을 읽고 답답했다. 작가의 답답함과 독자인 나의 답답함은 원초적인 거리가 있을 것이다.
나의 답답함은 '금'에서 시작하여 '말'로 맺는 답답함이다. 금을 긋는 자와 금을 지우려는 자의 대립과 작가의 표현처럼 풀어놓아서 마구 날뛰어야 힘이 생기는 그 말(言)에서 서로가 가슴이 미어지고 말문이 막히는 답답함이다. 토하가 야백을 다시 만나는 재회 편에서 '... 저 말이 그 말인가, 저 말이 몸속으로 살의 산맥을 출렁이게 하던 그 말인가'라는 표현이 머리에서 아직도 또렷이 기억되는 이유는 같은 나라 모국어를 쓰고 있지만 이제 馬를 인용한 言을 통해 感으로 言을 해석해야만 하는 통역의 시대에 살고 있는 비애를 느껴 슬프기까지 했다. 이제 세상은 정성적 말(言)의 진심보다 정량적이고 정황적 증거의 말(言)이 이기는 시대이고, 言의 법치는 덕(德)이 사라진 시대 속 울부짖는 말(馬)의 늦은 깨우침의 장면처럼 여겨져, 소설 속 말(馬)은 또 다른 인간(人)으로 다가온듯하다.
어느 한 외상 센터 교수의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자조 섞인 말에 기인하여, 그럼 생(Life)과 사(Death)를 리셋하여 새로운 사서(史)와 시대를 대립과 우열이 없는 동일한 출발선에서 다양성을 포용해 새롭게 스타트시켜봐도, 초와 단은 대립하고 전쟁하고, 우열을 가리며, 금을 지우고 긋는 약육강식의 잔인함은 기존의 역사와 똑같이 전개될 뿐이란 것을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거슬로 올라가서 새로이 시작해도 역사는 바뀌지 않고 '금'과 '말'은 바뀌지 않는다는 가중되고 답답한 느낌과 말(言)의 짓누름이 이 소설 속에 녹아있다.
'달려갈수록 세상은 멀어졌고 지평선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사회가 4차 혁명시대로 발전할수록 인간의 판단과 주체성은,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중무장 한 프로그램에 대체 의존되고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과의 대면은 질병과 더불어 바이러스성 말(言)을 서로 섞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능적 무사안일주의와 맞물린다. 시대는 이제 感을 상실하고 금을 긋는 시대로 너무 와버린 게 아닌가 싶다. 말(馬)을 타고 너무 멀리 와있는 것일까? 아님 말(言)을 타고 너무 멀리 홀로 남겨진 것일까?
초와 단,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불편한 소통보다 이제 편리한 단절을 선택해야 하는 시대로 치닫고 있다는 뉴스 멘트 속에서 토하와 야백이 재회한 후 '저 말이 그 말인가' 뒤늦게 깨닫고 뒤늦게 아쉬워하고 서로 그리워하는 굴곡과 왜곡으로 그으진 금을 지우는, 저 한 줄의 문장이 김훈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의 진정한 메타포로로 다가온다.
-2020년 7월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