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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Nov 02. 2019

경애의 마음

경애의 마음(김금희)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 "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필경사 바틀비(허먼 멜빌, 원제 Bartleby, the Scrivener-Herman Melville )'의 바틀비의 이해 못할 말투가 왜 '경애'의 말투와 오버랩되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겠다. 김금희의 장편 '경애의 마음'또한 소설의 특성답게 다양한 각도로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서야 밀려드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감정중의 하나가 허먼 멜빌의 바틀비( Bartleby)였다.


내편이 없다고 해서 내가 틀린 것도 아니오, 내편이 많다고 해서 내가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한 어느 작가의 말처럼, 옳고 그름은 고립과 외로움의 정서와는 연결고리가 다르다. '경애의 마음'은 옳다 그르다의 이분법적의 관점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고독과 고립의 정서적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경애의 마음'속 경애와 상수의 정서는 그들의 삶 속에서 굴곡되어 휘어진 마음의 끈처럼 다시 탄성을 받고 되돌아가는 여정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경애의 마음'이란 제목과 달리 소설은 상수의 눈에서 경애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을 만큼 상수는 경애의 마음에 중요한 파트너이다.


소설은 화재로 잃어버린 친구들, '파업 일기'로 양쪽에서 버림받는 전력, 이혼한 전(前) 애인과의 만남, 경애의 삶을 지탱해준 '언죄다'의 회사 상사 상수와의 독특한 인연으로 전개된다. 상수가 운영하는 SNS 상담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언죄다)'에서 상수와 경애는 익명으로 고립과 실연의 허무로 멍든 자신들을 SNS을 통해 지탱하지만 '언죄다'의 해킹 사건으로 '언니는 죄가 있을 수 있다'라고 옳고 그름의 처지로 몰리게 되는 점은 그들의 위로의 방식에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상수와 경애는 '최소수의 최소 고통'이란 현실적 당위성의 공리주의로 묶여있어 SNS에서 서로의 공감을 문답식으로 소통하였을지 모른다.


경애는 시니컬하고, 타인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다. 경애는 불의에 저항의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거대담론도 품지 않고 있고, 남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으며, 적당히 상처 받고 상처 주지 않으려는 체념의 모습과 유사하다. 아마 세상의 모멸감과 희망 없음에 적당히 얼버무려 자신의 삶 속에서 녹이려 하지 않으려는 개별적인 삶을 살고 있고, 그다지 투쟁적이지도 열정적이지도 이도 저도 않는 나무늘보와 같은 삶에 오래 길들여져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경애는 현실적이지 못하다. 현실적이라 함은 마음의 자로 재단하여 자신의 삶의 이득만 취하려는 행위로 정의한다면, 경애의 현실 없음이 '경애의 마음'의 기인된 주된 요소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정의롭다는 말과는 별개의 말이며, 아마'파업 일기'에서 사측에 항거한 경애는 노측에도 외면당하는 전력이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처는 그녀의 말대로 폐기가 되지 않는 어떤 시간을 말하는 주요 계기가 된다. 경애가 현실과 타협했다면 '경애의 마음'은 애당초 탄생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가는 어둡고 실패한 사례를 글로 쓸 수밖에 없나 보다.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고 무관심한듯한 경애와 무심코 오버랩된 바틀비의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와 다르고 같은 점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바틀비를 자본주의 팽창 속의 시대에 소외되는 삶인가 아님 개인의 특성과 기질에 기인한 것인가 하는 양면을 골몰하기에 앞서, 바틀비는 초기 자본주의로 가속되는 시대 속에서 소외되는 삶을 예견하여 쓸모없음 즉 무용한 사람의 인(忍)을 표현했다면, 경애는 초기를 거쳐 수정되고 또다시 변형된 신자유주의 현재의 흐름 속에서 왜곡된 열(熱)을 표현했다고 감히 추정해 본다.


경제체제는 정치체제를 수립하게 하고 거기에 문화, 사회, 예술, 종교, 역사와 같은 인문은 주어진 체제하에서 움직이게 되어있다. 노동 앞에서는 춥고 배고프다는 직관적 감각만 살아있을 뿐인 과거의 시대에 그 감각마저 소실될 위기의 전환점에 참을 수 없는(忍) 소외감의 차분한 포효가 바틀비의 소극적 외침이었다면, '경애의 마음'은 이미 과잉 체제의 열정(熱)에서 불가분으로 양생 될 수밖에 없는 먼 훗날의 잉여사회에서 버려지는 양분의 모습을 상수와 경애의 시대로 그리고 있다.


소비가 없으면 생산하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선(善)을 넘어서 이제 소비하지 않아도 생산하고 따라서 재고를 소비하기 위해 다시 또 생산하는 현재 시대에 살고 있다. 쇄락한 한국 방직공장 산업을 베트남으로 이전한 공장에서 계속 상품을 찍어내고 만들어야 하는 자본 과잉의 시대에 단면을 보여주는, 그 중심에 베트남의 영업팀으로 파견된 상수와 경애를 그려낸 구도는 바틀비의 낯선 저항의 시대와는 또 다른 극명한 비교 대칭점으로 와 닿았다. 또한 경애의 눈으로 목격되는 잉여 생산의 왜곡된 유통과 그릇된 삶의 태도의 악(惡)은 '경애의 마음'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화된 영역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으려는 나의 한계를 느끼게 한 대목이다.


도망가는 손님을 막기 위해 출입문을 막은 호프집 사장의 불법영업으로 화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도사가 된 사장의 면죄부의 모습과 이 사고로 경애는 친구 은총을 잃었던 점, 자사의 미싱을 팔지 않고 타사의 미싱을 대신 팔고 그 이익을 자사의 고위직과 공유하는 또 다른 영업팀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점은 '언니는 죄가 없다'는 상수의 역설적인 SNS 제목에서, 죄인이란 (죄야 누가 짓든 간에) 죄을 지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 처벌을 받는 그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며, 즉 죄인≠처벌은 이 시대에 통용되는 비극적인 공식이라고 처절하게 항변하고 있다.


경애는 프랑켄슈타인 프리징(frankensteinfree-zing) 특이한 아이디를 쓰며, 정작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프랑켄슈타인을 혼돈하는 모든 이들에게 정정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연민마저 드는 것은 , 어떤 시간은 가는 게 아니라 녹는 것이라서 폐기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마음을 견뎌내고, 어떤 시간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 두기도 하는 공포스러운 시간을 경애는 다시 가져보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바틀비는 시대적 전환점에서의 숙명론에 소외되었지만, 상수와 경애는 오히려 문명의 활황 속 시대가 가하는 아픔을 피해 가지 못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경애의 여름이 이별의 계절이었던 것도, 소설의 끝자락에서 여름이 지나간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베란다 창에 붙어있는 단풍잎을 보면서 희망의 서곡이 들어서는 계절적 구도는 그러한 점을 암시한다. 결국 상수와 경애는 녹지 않고 폐기되지 않는 서로의 죄의식에서 벗어나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만남 그리고 희망으로 승화하려는 조짐을 작가는 조심스럽게 피력하고 있다.


바틀비는 시대의 아픔을 피해 가지 못한 대신 강렬한 자성과 성찰의 화두를 던져주었고, 상수와 경애는 우리의 아픔과 상처의 극복, 신뢰와 화해 그리고 사랑으로 여름의 이별을 뒤로하고, 찬란한 겨울의 따뜻함을 맞이해야 되지 않겠냐는 당위성을 등장인물의 이름처럼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복선과 짜임새 있는 구조, 반복적인 우연, 그리고 역설적인 구도 아래 차분한 심리묘사로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경애의 마음'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러할 것이다

언니는 죄가 없다. 당당해야 한다.

언니와 우리는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서로의 사랑과 신뢰를 눈물겹게 맞이하여야 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언니는 조심스럽게 고백할 것 같다.

사랑한다고! 나와 너, 그리고 그 사랑을 갈망하는 모든 것을.


-2019년 이른 여름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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