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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pr 17. 2023

침범

전 직장 동료한테 이미지캡처 후 편집해서 보냈더니 역시 나답단다. ㅋㅋ 내가 요즘 그러려니 안 넘겨지고 분노조절이 안되고 욕지거리해야 응어리가 풀린다고 하고, 이놈의 나라는 왜 이렇게 안 바뀌는 거냐? 잠정적 얽매임을 양상하는 부조리를 보면 사람이나 나라나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떠나시게? 그러게 뭐 어떻게 해야 되나? ㅋㅋ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  (한국이 싫어서中에서, 장강명)


2015년에 출간된 책을 지금까지 안 읽은 이유는, 제목 보니 뻔한 내용 새로울게 뭐 있나, 격한 공감뒤에 따르는 무기력이 싫어서? 아님 마치 대중적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보다 3번이 더 감명 깊은 것 같은 나의 꼴같지 않는 허영? 자존감?


지금 읽어보니 시간적 거리감 없이 어제 출간된 책처럼 읽힌다. 주인공인 계나도 어지간히 싫은 게 많은듯하다. 나름 규모가 큰 회사에서 부서를 옮겨달라고 해도 말해서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고 도무지 비상식적인 이 나라에서 못살겠다고 그래서 기쁘지만은 않게 호주로 떠난다.


삶이란 것은 홀로 어둠 속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손에 온기가 닿은 느낌이 느껴질 때 온몸으로 그 온기를 꽉 쥐고 껴안고 견디기도 하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는 건데 이제 이 나라의 온기는 허공에 메마른 공기처럼 바스러지면서 건조한 질감만 느껴질 때가 많다.


점심시간까지 옥죄려 하는 저 구조적 답답함은 유독 굳건한 한국의 가족시스템에서 기인된 문화관습 아닐까? 좋다고 그저 오라고 하니까 무심코 그 관습에 몸을 맡기면 누군가 그 옥죔에 답답해할 수도 있는 법이라 이제 다 같이하는 만남의 횟수를 내가 정한 것 외엔 줄여야 되지 않을까 싶다. 또 그럴 나이이기도 하고.


만남이 잦아지면 헤어짐도 잦아진다. 결국 필요이상의 만남은 다시는 못 만나게 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중심을 좀 더 자기 무게로 이동할 줄 알고, 모처럼 닿은 온기를 간직하며 오직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침범하지 않고 호흡을 들을 수 있는, 스스로 존재하도록 하는 토대를 서로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 내가 한국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런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거야. 아마......'


어느 침대광고의 배경음악인 짐노페디(Gymnopedies)의 작곡가 에릭사티(Erik Satie)의 삶은 편안히 들리는 그의 음악과는 달리 좌절 속에 누추하고 허름한 아파트에 누구의 방문도 허용하지 않고 혼자 가난 속에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기이한 곡 중에 하나인 '짜증(Vexation)'이라는 피아노곡은 한 페이지이지만 악보에 840번 반복되게 해서 사티가 생존중에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다고 한다. 사티 또한 거대한 톱니바퀴에 저항할 수 없어서 저런 곡을 작곡했을까?


아마 주인공 계나는 '갈 수 있는 호주'보다 '떠날 수 있는 한국' 그 침범된 지점에서 계나의 선택은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급선무 아니었나 싶다. 이런 계나의 떠남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마냥 수긍이 되는 것은, 너무 늙은 세상을 너무 젊어서 침범한 사티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2023년 4월 17일, 휴가내고 순간지옥으로 부터 벗어나, 산행후 서운산자락 카페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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