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삽질이 모여 융합적 연금술이 될 때

정처없이 떠도는 시도와 도전, 좌절, 방황은 부대찌게 재료가 되었다.

by 키미키

누가봐도 대형자 P인 나는 예상과는 달리 일하는 목적과 목표가 분명한 경우엔 상당히 꼼꼼히 계획을 짜고 액션 플랜과 블루맵을 잘 짜는 타입이다. 10년 넘게 플랫폼에서 먹고 살다보니 JIRA와 Confluence, Asana, Clickup은 항상 창 한군데에 틀어놓고 스프레드시트를 주구장창 펼쳐놓고 journey map과 기간별 스프린트를 다 짜는 타입라 말하면 지인들 그 누구도 믿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회사를 벗어나 내 꿈과 비전, 나만의 것을 만들어 내보이기 위한 이행을 위해 계획을 세우는 건 그렇지 못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퇴사 후 대학원을 복학하며 내가 꿈꿔왔던 여러 작업들과 새로운 진로 탐색 및 창업 아이템을 만들어가는 계획(누차 말하지만 계획이다, 진행이 아니라)을 만드는 건 뭐 , 끽해봤자 한달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짜는 데 3개월이 걸릴 줄은 몰랐고 그런 계획조차 반 이상을 이행 못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획은 계속 바뀌었다. 이런 이행 탈주를 막기 위해 더욱 촘촘히 계획을 짰다. 아이러니하게도 계획이 상세해질수록 내 몸과 행동은 그 계획을 거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완벽하게 이루지 못하면 모든 것이 실패라고 여기는 '제로섬 게임' 사고방식(내 본디 가치관은 이렇지 않지만 오랜 기간동안 회사생활하며 세뇌된 사고 방식이란 참 무섭다)과 번아웃이 합쳐지니, 자책과 심리적 멜트다운만 심해졌다.


이런 비효율적인 나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다 문득 깨달았다. 계획이란 옷은 내 몸에 맞춰야 함을. 옷에 몸을 맞추려하니 당연히 쓸데없는 데에 기력이 다 소진되는 거 아니겠나. 생각해보니 내가 무언가 꾸준히해서 결국 이뤄냈을 땐 계획에 맞춰 캐리한게 아니라 걍 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즉흥적으로 건들고 어떻게든 흥미를 잃지 않고 재밌는 방향으로 즐기면서 결과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을 때 했을 때 였다. 물론 무아지경으로 하나만 집중했을 때도 동일한 효과를 이루지만 이 경우 이에 대한 값을 치루는 경우도 많았고,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기 위한 환경을 구성하는 것 또한 만만찮게 시간과 리소스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엉망진창 난장판 같던 나의 다양한 시도들과 도전들은 그때만 보면 결실도 못 얻고 시도만 하다 자꾸 다른 걸로 바꾸는 걸로 보여, 주변에서 참 이런저런 고나리도 많이 들었다. 나는 이상한데서 고집이 세서 그러든가 말든가 내 영혼(?)이 이끄는데로 진행했지만 그런 말을 계속 듣는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기에 혼자 고립을 주체적으로 택해 빠르게 이것저것 시도하고 실패하고 전환하는 사이클을 빨리 진행해서 내가 생각하는 결과값 데이터들을 모으곤 했다.


그런 이리저리 두서없이 날뛰는 것 같던 나의 여정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 전환학습의 탄성을 가속화로 올려 다른 전환을 더 빨리 할 수 있게 나를 단련시켜줬다. 이 모든 삽질들이 모여 어떻게 전환창작이라는 나의 가장 큰 강점이 되었는지 한 일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21년 말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현 시점에서 내 지난 3-4년의 활동들을 sns에서 곰곰히 지켜보던 넷지인들은 '이 인간 대체 뭐하는 인간인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도쿄올림픽 끝나고 펜싱에 꽂혀서 경기 찾아보다 펜싱클럽에 가입하더니 다리 근력이 모자른거 같다며 뜬금없이 DDR로 다리를 단련하겠다며 DDR 기계식 패드를 혼자 만들기 시작할때부터 폭주기관차처럼 훅 가버렸다. DDR 패드를 만들기 위해 나무판을 자르고 기기자판을 납땜하며 이리저리 전기 신호를 멀티미터로 재서 컨트롤러를 만들다 뜬금없이 50달러짜리 중고 허접 전자드럼셋을 업어와서는 그걸 고치고 있으니 말이다. 짜장면을 시켰는데 입이 심심하다며 탕수육, 짬뽕, 유린기를 한꺼번에 다 시켜서 한입씩 찍먹해보고 남은 걸 싸가고 있는 꼴. 하지만 이 뒤죽박죽인거 같던 나의 여러 활동들은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인간은 다양한 다면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처음 상대를 접한 첫 이미지만을 고정으로 바라보고 그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 실망한다. 좋은 모습도, 나쁜 모습도, 그냥 이런저런 모습도 다 상대의 일부인데도 말이다. 이와 똑같이 기술, 예술, 취미도 다들 딱 잘라 분리를 하려고 한다. 나는 그런 분류를 항상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분류가 딱히 이해도, 공감도 가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저 세가지는 뗄 수가 없는 기마놀이의 기수들이다.


전자공학 지식도 전혀 없으면서 베이스 드럼과 하이햇 페달이 고장 난 50달러 드럼을 고치기 시작했다. 납땜을 배우고 결국 영국의 모 엔지니어에게서 메가드럼 모듈 기판셋도 국제배송으로 받아 전자드럼 모듈을 직접 케이스와 기판부터 빌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DDR 패드를 나무패널 기반의 기계식 트리거 발판으로 개조를 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분해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직업병이 유용하게 쓰였다. 개발할 때 버그를 잡을 때처럼. 다만 기계/전자공학적 문제 해결은...정말 몸으로 부딪히는 개노가다인게 다르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디버그는 하다못해 에러메시지라도 던져주지...이건...정말이지...ㅠ


겉보기에는 코딩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활동들이 전환학습의 핵심이라는게 재미있다.

드럼과 DDR 트리거 셋트를 만들다보면 0.1초의 타이밍에 민감해진다. 단 1bpm이라도 늦어지면 바로 티가나는 드럼비트, 게임에서 fail을 띄우는 DDR은 단 1초 이하의 타이밍에도 승점이 갈리는 사브르와도 상당히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기점은 렌더링에서 1초의 플릭커라도 발생하면 난리를 치는 클라이언트와 타 부서 멤들의 난리를 피하기 위해 DOM렌더링 순번이 꼬이지 않도록 컴포넌트 로딩 렌더링 채이닝을 꼼꼼히 체크하는 프론트엔드 최적화, 실시간 데이터처리에서 레이턴시를 줄이려고 발악하는 것과 참 비슷하다(슬프게도). 드럼, 펜싱, DDR은 상황 분석, 전략, 극도로 정밀한 타이밍 감각을 연마하는데서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장비를 계속 빌드업하며 디버깅해야하는 나의 똥삽질도(...)


이러한 패턴의 인식은 음악과 데이터의 시퀀싱으로 이어졌다. 드럼 연주를 악보로 옮기는 채보작업을 수동으로 일일이 로직에서 찍는게 너무 귀찮아 파이썬으로 드럼비트 추출 자동화에 도전했다. 그러나 의존성 지옥을 경험하고 접기를 반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도때문에 퇴사 후 복학한 대학원 수업의 파이널 리포트에서 만점을 받아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양한 실패와 삽질, 내 피, 땀, 눈물(BTS...암쏘쏘리)이 이외의 곳에서 경험의 가치를 증명한 셈이다. 복잡한 시간적 패턴을 분석하는 능력은 행동 데이터의 숨겨진 리듬을 읽어내는 패턴 인식능력으로 전환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2021년 말부터 정처없이 이것저것 그냥 일단 드립다 2023년 하반기까지 시도해본것들은 2024년 말부터 점차 무언가 조형적으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것들이 결국은 한데 모아, 음악소스에서 비트를 추출해 그걸 미디 트리거 타격점 타이밍을 잡아내서 그에 맞춰 키네틱 타이포 애니메이션을 연출하는 비디오를 코드로 만드는 작업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참 멀리도 돌고도 돌아왔다면 돌아왔다할 수 있지만 과연 그래서 내가 이 종착지까지 '늦게' 온거냐면...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데이터,코딩,그리고 아트와 음악의 융합.


수많은 학과 중 왜 하필 데이터과학으로 택해 대학원을 복학한 걸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계속 자퇴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와버렸다. 하고 싶었던 시각적 저널리즘 작업을 위해 내가 스스로 데이터를 조합해 그걸 시각적인 디자인으로 재구현하고 싶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기초부터 제대로 다지고 싶었다. 글로만 따다닥 쓰는 게 아니라 인터랙티브한 랜딩페이지에서 시각화 디자인을 이뤄보고 그걸로 추상적인 인터랙티브 프로젝트 아트를 구상하고 싶었다는 뭉뚱그린 그런 청사진이 뇌에서 떠나지 않았다. 딱히 이성적인 계산의 선택이 아니라 어찌보면 뇌에서 떠나질 않는 그 내 뇌가 자꾸 망상해대는 청사진이 날 괴롭혀서, 이럴거면 걍 화끈하게 도전하고 대차게 망하든 뭐가 되든 확 정리를 하자(...)에 가까웠다.


2024년 말 여러 빡치는 일들이 많아 Remotion(React기반, 코딩으로 파라미터를 조절해 ffmpeg와 webgl, 크로미늄 엔진의 그래픽 렌더링을 써서 영상을 제작하는 라이브러리)과 GSAP를 활용하여 키네틱 타이포그래피 영상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들을 코드로 풀어 표현하며 여러 분노들을 승화했던 몇달간이었다. 그러면서 코드로 일일이 초마다 애니메이션을 지정해주는 지난히 고단한 이 비효율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템플릿을 만들던 것들이 모여 음성합성을 활용한 팟캐스트를 만드는 작업 프레임을 구축하게 되었다. 트랜지션 로직을 _shared/ 폴더에 모듈화해서 재사용화를 극대화했다.


React로 밥 벌어먹던 짬바가 이런데서 구현되리라고는 참 예상치 못했다...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그간 해왔던 드럼 비트 패턴분석 경험을 활용해 midi로 추출한 다음 이걸 midi/web audio api로 연동해 특정 음향이나 미디신호에 따라 트랜지션을 적용하는 키네틱 타이포 영상디자을 react컴포넌트로 내 작업 템플릿 만들기이다.


결국 이 모든 두서없어 보이는 시도들은 종착점으로 융합이 가시화되는 시점까지 모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전환해서 재구성하고 다시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그 과정을 수행하는 능력이 나의 특성기술이 된 것이다.


데이터의 논리, 모션이 주는 sensory 감성, 인간 경험의 본질(UX)을 융합해 인터랙션을 새로 만드는 과정을 정신을 차려보니 언뜻 걷고 있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은, 결국 이런 두서없는 행적들이 결국 내 가슴이 끌리는 가장 빛나보이는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기.


실패와 성장의 여정을 보여주며 문제해결과정도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야기 보따리가 채워진다.


완벽한 목표달성에 매몰되지 않고, 일단 시작해서 재미있게 반복하는 것이 나에겐 가장 중요하고 잘 맞는 방식이다. 예체능을 통해 체화되었던 나의 이 집요한 좀비근성은 번아웃을 겪어 언제 회복될지 기약도 없는 내 무너진 멘탈에 세세한 계획의 역효과를 극복하게 해준 열쇠였다. 실패한 데이터는 가장 강력한 학습데이터가 되었고 작업과정 기록은 과정아카이브 패키지가 된다.


겉보기엔 쓸데없는 삽질이 당신의 가장 강력하고 독보적인 무기가 될 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을 기록하고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내 당당히 당신만의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는 거라 생각한다. 최소한 나에겐 그러하다. 내 'Imperfectly Authentic Process as Product' 신념의 핵심이 이것이다.


이 포스팅을 읽는 당신이 이것저것 도전하는 거 같은데 뭐 한가지라도 이룬게 없어 보여 불안하다면, 내 이 글이 조금이나마 기운을 북돋아줬음 좋겠다. 나 또한 항상 그런 생각에 잠겨 우울해질땐 지난 3년간의 일기를 정리하며 다시 정신을 차리곤 한다.


하지만 당신이 해온 일의 가치를 결국 그 일에 아무런 시간과 노력, 힘을 들이지 않은 타인보단 귀중한 시간을 투자한 당사자가 더 잘 알 것이다. 본인을 믿고 지나온 모든 방황들은 언젠가 한 점으로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꾸준히 오늘 할 수 있는 걸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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