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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Dec 27. 2022

소란한 고요의 도시

[East]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했다.


소란한 고요의 도시



‘친구야, 인생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 한 번 그 위에 올라타고 나면, 네 마음대로 내려올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약간의 허세가 섞인 표정으로 분위기에 어울리는 멋진 말들을 읊조리곤 하던 장발의 형님을 떠올린다. 거의 2년 째 머리를 기르고 있지만 나와는 다른 차원의 장발을 가지고 있던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가 그 나이쯤 되었으려나. 아무튼 이 문장이 등장하던 순간에 우리 무리는 아마 쪽배 위에서 강의 건너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먼지와 물안개가 뒤엉켜 하나의 먹구름과 같은 모양을 한 도시 위로, 붉고 동그란 빛 뭉치가 어떤 정답을 암시하듯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내가 여행을 해 본 장소들 중에서도 이상할 만큼 장기간 머무는 여행자가 많은 도시였다. 나에게는 사흘 일정이 열흘이 된 정도였지만, 누군가는 귀국하는 비행기를 취소해야 했으며, 누군가는 세계여행 중 예정에도 없던 몇 개월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 도시에 머무는 동안은 유난히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각자의 인생에 대한 나름의 다짐이라던지 깨달음 같은 것들을 많이 듣기도 했다. 그중에는 한국에서라면 그런 고민 따위 맘 편한 인간들의 사치일 뿐이라 여겼을 법한 타입의 사람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여기서는 원래 다 그래.”


한 달 이상 체류만 꼽아도 대여섯 번째라는 장발 형님은 나의 질문에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바라나시에 붙들린 여행자들은 어째서 줄곧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던 걸까.


돌이켜보면 그곳은 지금껏 자신의 삶에 대해 무감했던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장소였던 것 같다. 거리 곳곳에 오물이 무신경하게 널브러져 있고, 아이들과 오토바이의 소음, 그리고 넘쳐나는 사람들의 숨결이 골목을 가득 채운다. 군중의 한복판에 자리한 빈민들은 거리의 개들과 함께 앙상하게 시들어가고, 강가의 화장터에서는 다양한 연령의 시신들이 끊임없이 재가 되어 강으로 흘러든다. 바로 그 강에 몸을 담그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은 사람들은 먼 길을 달려와 마침내 충만한 삶의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남과 동시에,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한 몸을 한 고행자들은 강가 곳곳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잡고서 삶이자 동시에 죽음인 거대한 물결이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것의 의미를 온종일 집요하게 곱씹는다. 흐린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삶과 죽음, 오물과 신성, 끝없는 동요와 고요가 도처에 역동적으로 분출되는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미루어 두었던 각자의 그것에 대한 고민을 어쩔 수 없이 시작하곤, 아직은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곳의 분위기에 크게 동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리고 잔뜩 고양된 6년 전의 나는 해가 떠오르기 전 숙소 옥상에서 명상을 하고, 잠깐이나마 채식을 결심하기도, 맨발로 부처의 첫 설법지를 향해 하루 종일 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그 외에도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기행들을 일삼았지만 결국은 나 역시 이런저런 질문에 답을 구해보려 했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두려워질 만치 버겁다가도 문득 설레오는 질문들 말이다. 당시의 내가 내렸던 몇 가지의 결론들 보다 현자 형님의 한 문장이 지금껏 뇌리에 남는다는 것은 조금 슬프다. 지금의 나는 줄곧 스스로 갈망하고 투쟁해온 결과인가, 아니면 어쩌다 올라탄 인생의 흐름 속에서 나름의 발버둥을 치는 평범한 인간인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바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여행자들은 결국 그들의 결심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나의 주위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답을 향한 한걸음인 듯 잔뜩 기대감에 부풀다가도, 한 순간 모든 길이 사라진 듯 무력해짐을 반복하며 장발 형님의 자조적인, 어른의 미소를 어색하게 흉내내는 일이 잦아질 뿐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면 그 도시에 조금 더 머무르며 고행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보아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흐름이란 어떻게 생겨난 것이었던가. 뭐 언젠가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이니까. 인생을 무한한 기회의 연장쯤으로 생각하던 시절, 금방 돌아올 여행지를 정하듯 시작했던 음악은 어느덧 3년 이상 몸을 담근 치열한 삶의 터전이 되었다. 그 결과 좀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함께 피시방을 전전하던 친구들이 어느덧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함께 설계하는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스스로의 삶과 매일을 분투하는 처지에 남았다. 어느 하나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후회는 없다. 후미진 동네의 한 구석으로나마 기회와 열망, 그리고 좌절이 격동하는 도시의 일부가 된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마땅한 책임 없이 자유롭다는 것에 사실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테다. 멋대로 꾸며둔 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글을 써내려 갈 때면, 어릴 적 정확히 이런 삶을 그렸다는 점을 상기하고는 일순 들뜬 마음이 되기도 한다. 다만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규정되는 일련의 과정에 응당 이보다는 구체적이며 계시적인 신호와 지침들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것이 네가 결정한 너의 모습이 맞느냐고,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충분한 경고와 함께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일들이, 또 나라는 사람은 너무도 손쉽게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을 겁없이 자신의 흐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능숙히 담아내며 뷰파인더 뒤로 건조한 빛을 내던 장발 형님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날 밤, 그 형님 역시 후회는 없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많이 외로울 때가 있다고. 그 말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맞아떨어진 점쟁이의 말처럼 오늘날 나에게 전에 없던 설득력을 띄고 있다. 누구에게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가늠하기 힘든 이 모든 흐름의 시작점에서 그것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면 나는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여전히 답은 찾을 수 없다.


동이 트기 전의 바라나시. 다만 자신이 되어보고자 소란스러운 도시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던진 수많은 여행자들과 우뚝 솟은 도시의 한 건물 위 자리한, 자그맣고 고요한 나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큰 호흡을 한번 내뱉은 후, 다시금 저 이질적인 혼란의 세계로 나아갈 때, 나는 어디로 가려 했던가. 또 무엇이 되려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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