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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Dec 25. 2022

유월에게

[West]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유월에게



꽃이 지는 계절이 돌아왔어. 눈을 감았다 뜨면 처음 모습 그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잠을 청해도 소담스럽게 피어난 그때 그 꽃을 다시 볼 순 없겠지. 그래도 괜찮아.


긴긴날 어떤 미지수 앞이면 고장이 나던 나야.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커다란 힘이 드는지 알잖아. 어느 사람의 노력이 깃든 날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변수가 원망스럽고 무서웠어.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했던 것 같아. 삶이란 본래 그런 건데도.


난 맷집이 두텁지 못해. 한 끗의 다름이 수천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세상에 ‘얄궂다’는 말을 습관처럼 뱉고는 했어. 이상하리만큼 촘촘하게 설계된 세계는 모른 척 지나치고 싶던 대상을 기어이 눈앞에 데려다 놓았고, ‘내겐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지레짐작한 날 기만하듯 매번 새로운 문제 속으로 이끌었으니까.


그런데 이 얄궂음을 조금은 사랑하게 되었다면 믿어줄래?


지금도 바람이 불어. 어김없이 풀잎이 눕고 꽃들이 흩날리네. 꽃잎의 방향을 궁금해하지 않게 된 대단한 전환점이 있는 건 아냐. 불어오는 사건 모두를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고.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고, 비극은 희극이 될 수 없잖아. 그저 켜켜이 쌓이는 삶으로 하루를 받아들이며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 우린 제 몫을 다하고 있어. 단지 스물아홉 번의 개화와 낙화를 바라보며 가지게 된 마음 하나 말해주고 싶어. 함부로 속단하지 않는 마음을.


꽤 오랜 시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느낌을 받을 때면 종종 서글펐던 것 같아. 이를테면, 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빨간가방 조형물 앞에서 981번 버스를 기다리던 나를 기억하니? 터미널 바로 뒤 아파트에서 논과 밭 그리고 단층 공장이 전부인 시골 변두리로 이사를 간 건 열다섯의 나에게 커다랗던 상실이었어. 시끌벅적하던 하굣길 다들 몸을 싣던 노란 셔틀버스에 홀로 탈 수 없었고, 그건 곧 오후 네 시 이후 추억에마저 내 자리는 없다는 걸 의미했지.

입대를 앞두고 45일의 계획을 하나하나 세웠던 첫 유럽여행은 또 어떻고. 한 도시마다 빼곡히 세워둔 계획을 현실로 만들어가던 즐거움이 어찌나 짜릿했는지 몰라. 아직도 몽파르나스 타워 옥상에서 두 눈에 담은 반짝이던 에펠탑과 코튼캔디를 떠오르게 하는 저녁하늘을 잊지 못해. 그렇게 여운을 안고 숙소로 향하는 골목길에서 내 머리는 고꾸라졌지. 피가 솟구쳤고 난 쓰러졌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 물었어.

"Est-ce que ça va?"

어땠냐고? 처음에는 정말 망했다 싶었지. 열다섯의 내가 저수지변 아파트, 시내버스로 학교까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리던 그곳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건 외로움과 애타는 기다림뿐일 거라 생각했어. 아홉 시도 안 돼서 끊긴 막차 때문에 첫사랑 아이의 매정한 문자를 받고도 개구리인지 맹꽁이일지 모를 소리만 무한히 듣고 있던 그해 여름은 무력감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요란한 소리를 내는 앰뷸런스 안으로 몸을 옮기던 파리의 밤도 다르지 않았어. 누군가 조각난 유리병과 3층 테라스를 가리키며 어떤 사고가 일어났는지 알려주었지. 웅덩이 진 피를 바라보며 매스꺼움을 느끼면서, 가까스로 준비해서 떠나온 내게 왜 이런 일이 닥친 건지 의아하고 억울하기도 했어. 무엇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파장이 어디를 향해 닿을지 두렵기도 했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파장은 나의 각오 또는 불안과 전혀 다르게 뻗어나갔어. 그게 내가 이 얄궂은 삶을 조금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해.


저수지변 아파트로의 이사는 열다섯의 내게 어떠한 상실과 외로움, 기다림만을 준 게 아니야. 981번 버스를 기다리던 어느 날, 접점이 없던 새로운 무리의 친구들을 만났어. 그 친구들과 함께한 이 년 동안 서로가 어떤 모습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배웠지. 그때의 만남과 우정은 구부러진 천변, 길가의 고양이가 쉬어가던 친구집 마당, 노을을 바라보며 설익은 감정을 주고받던 육교로 우리를 이끌었어. 누군가 나의 십 대에 대해 물어볼 때면 그 시절의 충만함과 행복함을 빼놓지 못해.  


파리의 한 응급실에서 머리를 꿰매고 있었던 건 그로부터 여섯 해가 지난 스물 하나의 나였어. 얼얼한 통증과 어지러움이 거짓말처럼 여겨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원에선 구급차 비용과 치료 비용을 처리하는 데 5일 남짓 걸린다고 안내했어. 5일 뒤면 이미 파리를 떠나 스트라스부르의 거리를 활개치고 다닐 예정이었는데 말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기차표와 숙소를 취소한 뒤, 깊은 밤에 빠져들었어.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파리여행이 시작되었지.


눈을 뜨자 비니를 쓴 한국인 형이 날 바라보고 있었어.

 “파리까지 와서 왜 숙소에 누워 있어요?”

시간을 보니까 이미 오후 1시가 넘었더라고. 몸을 일으켜 간밤중의 일을 말했어.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지난 사고를 무겁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어. 조잘조잘 신나게 재현하기 시작했지. 내 귀에 들려온 소리와 피부에 닿은 감각, 프랑스어와 영어가 뒤섞인 앰뷸런스에서의 혼돈의 대화까지. 마치 무용담처럼 한참을 떠들고 나니 주변에는 다른 여행자들도 몇 명 모여 있었어. 어떤 누나가 말했지.

 “나 이렇게 웃긴 사람 처음 봐.”


낯선 사람에게서 진짜 처음 듣는 말이었어. 웃기다고? 내가 웃기다니. 유달리 낯을 많이 가리는 탓에 초면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잘 들어주는 사람’, ‘착해 보이는 사람’ 정도의 얘기만 몇 번 들었지 내가 웃길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정말 웃기고 싶더라고. 이미 계획은 망가졌고, 알아본 파리 명소도 몇 개 안 남은 그 시점에 난 새로운 일행들과 여행을 시작했어. 정해진 일정에 대한 부담도 없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으로 앞장서서 거리를 활보했지. 마지막 밤, 파리 맥도날드에 들어가 맥너겟을 산처럼 쌓은 우리는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주고받았어.

 “사실 한국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다가 도망치듯 파리로 왔거든. 근데 언제 어디서든 함께 웃게 해주는 널 만나서 정말 좋았어. 고마워.”


내게 고맙다고 말하던 그 누나의 찡한 표정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어. 나조차도 몰랐던 나의 작은 힘을 깨닫게 되었달까. 다사다난했던 유럽여행은 이후 하나의 동력이 되었어. 내 안에 잠재된 밝은 에너지를 요령껏 발산했지. 몇몇 친구들이 장난스레 묻기도 했어. 머리 깨지고 너 조금 이상해진 거 아니냐고. 만약 노을 진 파리를 눈에 담았던 그날 저녁, 3층 테라스에서 맥주병을 떨어뜨린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아마 내가 정한 틀 안에서 45일의 여행을 성실히 마치고 돌아왔을 거야. 그랬다면 변화는 없었겠지. 정말이지 인생은 늘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어.


알 수 없다는 것. 그건 우리가 이 삶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듯해. 때론 얄궂고 너무 밉기도 하지만, 이 알 수 없음이 아니면 일찍이 모든 걸 포기했을지 몰라. 열다섯과 스물 하나, 이제는 먼 과거이기도 한 이때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 건 유월의 내게 필요한 기억이라 그랬어. 올해의 봄이 왜 그리 버거웠는지 몰라. 자리를 옮겼음에도 불시착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갈 땅이 이곳이 맞나 매일매일 의심하며 지내거든. 하지만 괜찮겠지. 지금의 고민은 무수한 관계와 경험으로 퍼져 오늘 회상한 기억들처럼 내 삶을 가득 채울 테니. 여전히 얄궂은 삶이 어디에 다다르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어. 다만 어디로 가든 이 삶을 조금 더 사랑해볼게.


잘 부탁해.


Fi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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