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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Feb 19. 2023

휘청이는 악당들 - 3

[East] “내가 이번에도 나빴습니까?“


휘청이는 악당들 - 3



중키에 다부진 어깨와 기묘하게 묶어 올린 머리, 그리고 적의에 가득 찬 눈빛. 평소보다 이르게 집을 향하던 어느 날 저녁, 마침내 집 앞 슈퍼를 찾는 아저씨를 목격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며시 뒤를 돌아 다시 한번 실루엣을 확인한다.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자물쇠가 고장난 철문을 굳게 닫고,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문다. 이제 나는 수 분내로 그를 마주하게 된다. 막상 결전의 순간을 목전에 두자,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보다 최악의 경우 어떻게 방어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 고민과 습관적인 공포감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손잡이가 잘 돌아가는지 몇 번을 확인하다 만일의 경우 빠른 도피를 위해 현관문은 활짝 열어두기로 했다. 계단에 놓인 우산이라도 집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아저씨는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잔뜩 긴장한 탓에 지나치게 명랑하고 큰 소리의 인사말이 튀어나왔다. 오랜만에 찾은 옛 동네의 단골 식당 아저씨에게나 건넬 법한 밝고 선량한 인사였다.


“뭐야 이 시빨 양아치 새끼가, 뒤지고 싶냐 엉?”


“아니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정면으로 마주한 아저씨에게 듣는 생생한 위협의 말들은 예상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첫인사 한 번에 죽음을 논해야 하다니. 아저씨와의 대면이 섣불리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험난해질 것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힘들게 마련한 자리를 금세 박차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아저씨의 이마 가운데에는 나의 상상이라고 믿고 싶었던 박치기의 증거가 굳게 박혀있었다.


“지랄, 요즘 계속 니네가 쿵쿵거리는 거냐? 오늘 확 다 죽여버려야지 양아치 새끼들.”


“어이, 그 안에 다 있냐?”


“저 혼잡니다. (한 걸음 비켜서 아저씨에게 집 안을 보여준다.) 저 정말 아니에요. 자꾸 죽인다고 그러고, 저한테 왜 그러세요 진짜.”


“하, 씨발. 그 안에는 따듯하냐?”


“네, 저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위층에 살고 계시죠?”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양아치 새끼들이 존나 쿵쿵거리잖아 시끄럽게.(아마 본인이 내는 소리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우리가 사는 곳은 2층 건물이다.)”


“아이고, 그거 어떡하죠?”


“아 시팔 좆같네 진짜!”


아저씨는 돌연 괴성을 지르며 엄청난 기세로 철문을 열어젖힌 후, 순식간에 달려와 오직 여섯 칸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섰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지만 이쪽도 이번만은 쉽사리 물러설 수 없다. 잔뜩 굳어버린 나와 씩씩대며 다음 동작을 고민하는 아저씨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미 도망칠 곳은 없다. 나는 어떤 실마리라도 발견하려는 듯 아저씨의 눈을 바라보았다. 흡사 상처 입은 맹수의 눈을 한 아저씨의 시선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이 세계 너머의 머나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멍하니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도 길을 잃은 듯, 악몽처럼 끝없이 늘어지는 장면 속에서 나는 굳게 잠긴 문을 두드리듯 하릴없이 그의 두 눈을 응시했다.


어느 가을 저녁 홀연히 추락하는 첫 낙엽처럼, 아저씨의 눈빛은 예고 없이 현실의 초점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처음으로 온전히 나의 시선을 마주했다. 얼핏 보기에 짙은 안개를 두른 듯 흐리게만 보였던 그것은 의외로 다분히 직설적이라 해도 좋을 감정들을 넘치게 담고 있었다. 나에게 아주 익숙한, 하지만 나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생생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에 대한 슬픔과 무력감 같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숨기려는 듯 마구 휘저은 분노로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진 눈이었다. 어떤 명료한 진리나 희망도 저 눈앞에서는 금세 빛을 잃게 될 테다. 블랙홀을 옮겨놓은 듯한 그의 눈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라 휘청였고, 아저씨의 얼굴은 일그러짐과 멍해지기를 반복했다. 서로에게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두 사람. 그 사이에 놓인 시간은 역시 이렇다 할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비현실의 영역을 빙빙 돌 뿐이었다. 아저씨는 그때 내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괜찮아요. 아저씨, 다 괜찮을 겁니다.”


침묵을 깬 것은 내 쪽이었다. 어째서 불쑥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 입 밖으로 내놓고 나자, 지금 상황에 이보다 적절한 말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아저씨가 나를 해칠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다 괜찮을 거라고, 괜찮다고. 특별한 효험이 깃든 주문이라도 되는 듯,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억울하리만치 두터운 벽을 쌓아 올린 나의 일부분에게, 그리고 자주 길을 잃고 헤매이는 아저씨의 의식 사이로 그 말만은 조금이나마 스미기를 바라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주춤하던 아저씨는 이제 그만 되었다는 듯, 별안간 절규하며 계단 아래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모조리 밖으로 던져버리고는 있는 힘껏 철문을 닫고 소리를 지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비현실적며 과격한 일련의 동작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그럭저럭 끝이 난 것인가. 아저씨가 다시 우리 집 현관을 찾을 일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화풀이의 대상으로는 어딘가 부적합한 인간. 아저씨에게 나는 적어도 그렇게 기억되지 않았을까. 모든 일들은 담배 하나를 채 다 피우지 못한 사이에 끝이 났다.


아저씨는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몇 가지 버거운 감상과 2주일 치의 재활용 쓰레기를 남긴 채. 골목 전체에 널브러진 빈 생수병과 컵라면 용기 따위를 주워 담으며, 나의 이웃이 살고 있는 2층 현관을 올려다보았다. 끝없이 휘청이고 도망쳐야만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약한 사람은 언젠가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걸까. 아저씨는 끝내 어떠한 설명도 주지 못했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적어도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을 테니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공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위로, 마침내 제 길을 찾은 시간은 다음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몇 달 후, 어느새 감옥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아저씨를 대신해 이삿짐을 정리하러 온 아저씨의 형, 누나가 되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아저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집 안을 한번 둘러보아도 좋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웠다.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수많은 물건들 중, 모두 합치면 수백 장은 족히 넘을 카세트테이프들이 눈에 띄었다. 음악을 듣는 일은 아직 정신이 온전했던 젊은 시절 아저씨의 거의 유일한 취미였다고, 누님 되시는 쪽이 일러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무렵, 그녀는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지고 가도 좋다고 말했다. 커다란 원목 수납장 하나와 카세트 플레이어, 그리고 수십 장의 테이프를 되는대로 박스에 담아서,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손때가 가장 많이 탄 테이프를 카세트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난생 처음 듣는 미국 밴드의 헤비메탈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난데없이 고꾸라지고, 눈물을 흘리고, 또 나빠지는 날들 속에서, 나는 아직도 종종 아저씨의 꿈을 꾸곤 한다. 끝내 마지막 인사는커녕, 제대로 된 눈인사 한 번 주고받지 못한 나의 이웃. 휘청이는 악당. 아마도 이제 다시 그를 마주하는 일은 없을 테다.


 -


쿵 쿵 쿵.

헉 헉 헉.


“아저씨, 아저씨는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글쎄, 너는 어쩌다 그 모양이 되었냐”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Fin.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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