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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pode Apr 11. 2023

기억의 무덤에 짓는 집

[West] Let me photograph u in this light


기억의 무덤에 짓는 집



긴 여름이었다. 강물이 범람했다. 해어진 기물이 거리로 쏟아져 내렸다. 순서 없이 쓸려 나갔다. 골목 구석 먼지마저 씻겨 사라졌다. 더듬거리며 걸음을 이어가다 발을 잘못 디뎠다. 몸이 기울었고 소리 낼 새 없이 물살 속으로 휩쓸렸다. 마치 열대지방의 우기인 양 끊이지 않는 비가 내리던 여름에 길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고요한 일광이 내리는 어느 작고 외딴 섬의 버석한 검불 위였다.


마른 바람이 코 끝을 스쳤다. 이대로 미동 없이 누워있고 싶었다. 굳이 몸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순간 모래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모래알이 들어갔다. 어서 일어나라고 보채는 듯했다. 깨어지고 부서진 조각을 닦아냈다. 서먹하지 않았다. 이제 내 것이겠거니, 생각한 풍경과 작별하는 일에는 다들 익숙하지 않나. 단지 평형을 되찾는 데에 조금 품이 들뿐이다.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울 만한 곳을 찾으러 주위를 살폈다. 구릉이 즐비했다. 둥그스름한 구릉 하나는 작은 결정의 빛깔까지 보이는 양지에, 야트막한 또 다른 구릉은 골짜기 아래 함께 침강하는 것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기묘한 색을 띤 그것들을 바라보다 피어오르는 기시감에 멈춰 섰다. 사랑했고 때로는 절망했으며 환호와 울음 사이 안달났던 시간이 엇비쳤다. 나직한 구릉의 연속. 다시 집을 짓고 살아갈 자리, 기억의 무덤이었다.


고운 프레임에 담아 빛이 잘 드는 곳에 간직하고 있던 시절과 사람부터, 이름 없는 유령이 되어 가끔 머릿속에서 툭툭 내 이름을 부르는 얼굴까지. 삶을 지탱해온 관계나 곧 그것이 삶의 전부였던 방향성이 흔들리고 무너지던 순간마다 되처 바로 설 수 있던 곳은 바로 그런 기억의 잔해들 위였다.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어떤 기억은 삶 전체를 보증해주고는 했다. 너에겐 시간이 있어. 너는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야, 더 행복해도 될 사람이야, 라고 일깨워주는 기억의 품 안에서 매번 다시 살아났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먹었던 팥양갱 하나가, 다리를 오므린 채 어머니와 밀가루 반죽을 쳐내던 일요일의 부엌이, 노들섬 회색 계단에 기댄 채 서로의 어깨를 빌어 석양을 바라보던 순간의 온기가 그랬다.


그럴 때면 기억이란 과거 안에 멈춰진 채로 보존되는 것을 넘어, 먼 미래로 번져가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고 있는 것도 같았다. 마음에 자리를 튼 기억은 새로 탄생할 사람과 사건을 기다릴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기록이 그것을 도왔다. 나의 책상서랍 가장 아래칸에는 각종 기록의 수단이 잠들어 있다. 어린 시절 알록달록한 색으로 빽빽이 채웠던 그림 일기와 중고등학교 에피소드를 날것의 말로 작성한 200통 가까운 임시메시지가 있는 폴더폰, 크고 작은 크기의 사진과 두툼한 편지 묶음, 수천 개의 같은 파일이 저장되어 있을 USB와 카메라 메모리칩 등등. 어떤 기록은 너무 솔직해서 겸연쩍고, 어떤 기록은 조금 부끄러워 남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곧 켜켜이 쌓아온 나의 현재들이며, 나름의 방식으로 나의 과거를 증명해준다. 잠깐의 추억과 사랑은 곁에 오래 남아, 긴 추운 날을 지나 미래에 다다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기록을 게을리하지 않는 습관을 가졌다. 온갖 감정, 눈 마주침과 돌림, 말 한마디와 침묵, 우연이 만든 동행, 서로가 가닿거나 닿지 못해 외롭게 사라진 마음이라도. 어쩌면 일종의 집착과도 같은 꼴로 전이된 기록은 충실히 제 몫을 다했다. 이따금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여 사진이나 글을 정리하고, 그 시절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지 고민하다 비로소 폴더명을 바꾸고 나서야 안심하던 날이 잦았다. 반나절을 넘어 하루 이상 그 기억들을 어여쁘게 재단하고 보관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갑갑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을 기록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묵음으로 끝난 관계일지라도 그 기억에 기대 잠을 청할 수 있던 숱한 밤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사랑이 지나가, 별빛이 지나가, 젊음이 지나가, 홀로 새로운 궤도를 그려나가야 할 순간 앞에서 기억과 기록은 지지 않고 고개를 든다. 삶과 죽음이 몇 차례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오늘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가 서있는 이곳이 결코 황량한 불모지가 아니라 생명이 우거질 수 있는 땅이라는 믿음에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릴 수 있었다. 난 지금도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셔터를 누르거나 투박한 손글씨로 꾹꾹 힘을 주어 몇 줄의 문장을 써내린다.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무사히 짓기 위해 변함없이 기억을 단단히 다듬는다.


긴 여름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가 내렸다. 다만 언젠가 그칠 거라 믿었고, 그건 맑은 하늘 아래서 따뜻한 손을 잡고 힘껏 내달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잠시 길을 잃고 작고 외딴 섬으로 떠밀려와 메마른 구릉 사이를 헤매고 있을지라도 다시 삶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여전하다. 이 기억의 무덤 위에 새로 지어질 집을 기다린다. 난 한 송이 꽃을 집었고, 그건 어떤 안녕을 의미했다.


난 한 송이 꽃을 집었고, 그건 다른 안녕을 의미한다.



Fi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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