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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투안 Apr 08. 2024

삶이 힘들 땐 오히려 고통을 선택해 보자

고통의 3종 세트로 시작하는 하루

예전에는 생각해보지도 않은 생각이 최근에 떠올랐다. 


스스로 고통을 부여하는 것이 나의 삶의 원동력이 된다.


고통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자신 스스로 정의 내리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고통이라는 듣는 순간, 아프고, 싫고,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삶을 좀 더 깊이 바라보면 고통이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단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닌 정신적인 고통 또한 포함된다. 


 난 어릴 적부터, 신체능력은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고통과 관련한 첫 번째 경험은 초등학교 시절 때다. 자리에 앉아 공부하기보다, 밖에 나가 뛰어놀며, 점심시간에는 또래들과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에 나가 축구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방과 후에도 축구를 했다. 체력과 에너지는 남들 부럽지 않게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운동회 때는 이어달리기 및 100m 달리기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성적이 좋다 보니 신체를 움직여 기록을 내는 것에는 근자감 (근거 없는 자신감) 이 항상 내재화 되어있었다. 혹은 좋은 성적을 경험하며 근자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에서의 경험이다. 성인이 되어 군복무를 수행하기에 어릴 때와 비교하면 턱 없이 모자란 체력이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속했던 시기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20kg가 넘는(몇 킬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군장을 메고 혹한기라는 훈련을 뛰고, 행군을 했던 기억에 남는다. 게다가 보통 K2 소총을 메고 훈련을 뛰는 선후임과는 다르게 나는 K3 기관총 사수였기에 8kg 정도 무게가 나가는 총을 군장 위에 추가로 걸친 후 총 30키로에 해당하는 무게를 짊어지고 수십 킬로를 걷기도 했다. 


 그 당시엔 체격이 작은 편이었기에, 선임들은 모두 무시하는 말투로, 나중에 낙오할 거라고 쉽게 얘기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훈련을 거치며 단 한 번도 낙오하지 않았다. 그 당시엔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때 고통의 한계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되돌아보면, 내 젊은 날의 고통들은 고통으로만 남아있었다. 물론, 학창 시절엔 체력과 관련해서 항상 좋은 성적을 내고 훈련에서 낙오하지 않았을 때는 당시 뿌듯함과 자신감이라는 보상으로 나에게 다가왔지만, 그 힘의 위대함을 잘 알아채리지 못했고, 나이가 들며 보통의 사람들처럼 되도록이면 고통을 피하며 살아왔다. 주말이되면 의도를 갖고 쉼을 선택하고, 늦잠을 선택했다. 


 그랬던 내가 현재는 주말에도 되도록 일찍 일어나 일을 하고, 고통을 선택해서 하루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일어나서 필라테스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웨이트 + 러닝을 한다. 거의 2시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찬물샤워로 마무리한다. 이렇게 나는 나에게 고통의 3종세트를 선물한다. (1. 필라테스 2. 웨이트 + 러닝 3. 찬물샤워)


 아침을 이와 같이 보내면 무엇보다 뿌듯하다. 고통스럽긴 하지만 스스로 선택해 모두 해냈다는 기분이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하루를 보내는 중간에 근육통이 느껴진다. 근육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즉, 이 모든 게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어"라고 말해준다. 


고통의 종류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첫째, 타인에 의한 고통

둘째, 자의의 선택(의도)으로 인한 고통


 군대에 있을 땐, 타인에 의한 고통이었다. 내가 선택한 훈련이 아니었고,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해야 했다. 따라서 당시엔 죽도록 하기 싫었다. 훈련의 '훈'자만 얘기가 나와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러나, 부대 단위의 큰 훈련이었기에, 함께하고, 함께 해냈다는 감정이 훈련 후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뿌듯함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대부분 혼자 하는 신체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순간이 기다려지고, 마친 후에도 뿌듯함의 지속성이 오래가며, 다시 하고 싶다고 느껴진다. 물론, 사람인지라, 가끔 귀찮기도 하고 편안함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실행 후 해냈을 때의 감정은 잠시 편안함의 유혹에 빠져 죄책감을 경험하는 것 그 이상의 행복감을 얻을 수 있기에 최근 시작한 필라테스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속하고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걷기 위해서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 목적 하나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일부러 일본의 북녘 끝까지 날아온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운동을 선택했고, 심지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오로지 '마라톤 완주'라는 목표를 갖고 자신을 한계에 몰아넣는다고 한다. 한번 뛰기 시작한 순간 멈추지 않는 것이 그가 자신에게 주는 한계인 것이다.




2023년 바프 준비할 때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한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꼭 지켜야 하는 룰을 만들어,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는 삶, 이러한 삶이야 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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