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어를 아세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신작 비디오가 나오면 얼른 예약해야 하던 때가 있었다.
신문에 실린 TV 편성표를 보고 주말의 명화를 꼭 찾아보던 즐거움도 있었다.
늘 자정 무렵에만 하던 라디오 영화음악프로를 꾸벅꾸벅 졸면서 기다리던 추억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그래서 더 그리운 그 시절.
그때 그즈음 홍콩영화의 전성기도 함께했었다.
그리고 80, 9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영화는 홍콩 반환과 맞물려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홍콩영화 특유의 B급 감성이 외면받으면서, 홍콩 안에서도 홍콩영화를 살리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는데, 이 즈음 나온 영화가 장국영의 ‘유성어’이다.
장국영의 영화 중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에 속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애정하는 영화다.
영화 줄거리는 다소 뻔하다.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 조락은 자신의 호화 보트에서 버려진 아기를 발견한다. 아기를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점점 마음을 주면서 빈털터리가 되고나서도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게 된다. 4년 후, 열악한 환경이지만 이제 완전한 아빠와 아들이 된 두 사람의 주변에 자선사업가 소군이 나타난다. 절박한 사정으로 젊은 시절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소군과 가까워지는 조락과 아명. 결국 소군이 친엄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는 아명을 소군에게 보내는 조락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사실 ‘유성어’는 조금은 억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케이지맨>으로 홍콩 사회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드러내 홍콩 금상장 감독상을 받은 장지량 감독에 대한 기대감에 비해 밋밋했던 연출력이라며 냉정한 평가를 들어야 했고, 홍콩영화 특유의 화려함이나 오락성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심한 외면도 받았다. 이전의 홍콩영화의 느낌을 완전히 벗어난 잔잔하고 묵묵한 소재와 흐름이 너무나도 낯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주연인 장국영이 출연료 1달러만 받고 출연했을 정도로 제작에 열정을 쏟았고, 아들 역할인 아역배우와 진짜 부자처럼 보이기 위해 사적으로도 많이 노력을 했다는 일화를 넘어 영화는 매력적이다.
<영웅본색>의 전화로만 아빠였거나 <종횡사해>에서 마지막 장면에서만 아빠 같은 역할이 아니라, 진짜 아이를 키우고 생활하는 장국영 아빠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가슴 한켠을 아리게 만든다. 아역의 연기와 조화 그리고 잔잔한 에피소들도 극에 재미를 더한다. 특히 같은 처지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동네 주민인 오가려(B급 에로영화에 주로 출연하던 오가려는 이 영화로 금상장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와 장국영의 사정을 눈감아주는 마음씨 착한 경찰관 역 적룡(영웅본색에서 장국영의 형 역할)의 따뜻하면서도 진실된 연기는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맴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국영이 작곡한 이 영화의 주제곡 ‘소명성(小明星)’.
인생의 어떠한 난관에서도 하나의 별(희망, 사랑)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영화 내용과 어울리게 노래 또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아름답다.
감미로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곡 전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운을 남기는데, 그만큼 완성도가 뛰어나다(이 시기 장국영은 직접 프로덕션을 차려 음악 작업에 집중했다고 한다).
많은 팬들이 <아비정전>에서 꺼거가 친모에게 거부당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명장면으로 꼽는데, <유성어>에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보내는 꺼거의 처연한 표정이나 모습도 이에 못지않게 먹먹하고, 애잔하다.
이제 언제 어디서든 꺼거의 노래와 영화를 듣고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어렵게 꺼거의 음반을 구하고, 영화 나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던 그때만큼, 간절하지도 열렬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유독 꺼거가 그리워 물들듯이 목이 메이는 날이 있다.
얼마전 적룡이 인터뷰 도중 <유성어>의 촬영 뒷이야기들 나누다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그저 그가 그립습니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