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마녀전>을 아시나요?
1993년 중화권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금마장 시상식에서 아주 재미난 장면이 연출됩니다. 바로 최우수 영화 주제가상에 영화 <백발마녀전>의 주제곡 〈紅顏白髮, 홍안백발>을 작곡한 장국영의 이름이 호명된 것입니다.
당시 전문 음악가들로 이루어진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장국영이라는 이름이 불려지자 가장 놀란 사람은 꺼거 자신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시상식에서 음악가로 인정을 받을지 본인조차 몰랐던 것이죠. 더구나 이후 금마장에서 남우주연상에 수차례 노미네이트 되었음에도 단 한차례도 수상을 못하면서, 1993년의 장국영의 최고 영화 주제가상 수상은 지금도 회자되는 흥미로운 사건입니다.
영화 <백발마녀전>은 한국에서는 흔한 홍콩 오락 무협 영화로 저평가되어 있지만, 사실 중화권 박스오피스에서도 크게 성공한 꽤 잘 만든 무협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무협 영화로는 드물게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우인태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영상미와 흥미로운 서사 연출이 더해져 아주 볼만한 덕분입니다.
홍콩의 유명한 무협작가인 양우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명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무당파 후계자 탁일항과 마교 집단의 우두머리 연예상의 신분과 세속을 뛰어넘는 사랑을 기둥 줄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무협 영화 특유의 화려한 볼거리와 운명적 사랑과 비극이라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주연인 장국영과 임청하의 연기입니다.
한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과 세상이 반대하는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섬세한 연기는 장국영이 아니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어 보입니다. 여러 무협 영화에서 중성적인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었던 임청하는 사랑에 빠진 사랑스러운 여인에서부터 배신이라는 오해로 마녀로 변해버리는 복잡한 역할을 아주 매력적으로 보여줍니다. 이후 몇 차례 리메이크 된 <백발마녀전>과 비교해 보면 이 둘의 연기가 얼마나 멋졌는지 더욱 느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장국영이 작곡한 <홍안백발>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미로운 곡 전개는 영화 속 애절한 사랑을 돋보이게 합니다. 가사를 모르고 들어도 녹아내릴정도로 곡 자체가 아주 훌륭해, 실제로 중화권에서는 지금도 손에 꼽히는 영화 음악이기도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영화의 흥행 덕분에 후속으로 제작되었던 <백발마녀전 2, 천하무적>의 주제곡 <忘掉你像忘掉我, 망도니상망도아> 역시 장국영이 작곡을 해 가수 왕페이가 부른 명곡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곡들을 모두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한 번이라도 이 곡들을 들어본다면 장국영의 음악적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두 공감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으니 영화와 함께 꼭 추천드립니다)
어렵게 용돈을 모아 스크린, 로드쇼 같은 잡지를 모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쉽게 영화든 정보든 찾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영화가 그때만큼 재미가 없을까요.
홍콩 영화만의 그 특유의 정서와 감성으로, 촌스럽지만 따뜻하게 삶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영화들이 그리운 날입니다.
이제 영화 한 편 끝까지 보기 힘든 내가, 가슴이 아려 오랫동안 잊지 못하는 그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씁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