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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Sep 30. 2015

토마토 주스

사람들이 보는 대로 맞춰줄 때가 있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실제로는 어떤지 설명할 때도 있지만 매번 설명하는 건 (실제로는 해명하는 기분이다) 매우 힘든 일이다.


예전에 있던 일이다. 점심을 먹고 대리님과 빌딩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다. 평소에 커피를 마시지 않고 배도 부른 나는 괜찮다며 안 마시겠다고 했다. 그러자 대리님이 

"괜찮아. 식권카드 돈 많이 남았어." 

라고 했다. 나는 마시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이었는데 대리님은 돈이 많이 남았다고 한다. 대리님의 입장에서 이 대화 사이에 숨어 있을 문장은,

"저번에도 사주셨는데, 매번 얻어먹기 부담스러워요 대리님."

정도가 될 것이고, 동시에 다음 문장도 예상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대리님은 선임자로서 올바른 역할을 했다며 만족했거나 혹은 안심했을 것이다. 만족한 것은 나는 후임에게 음료수를 기꺼이 사주는 넉넉한 사람이다라는 인식이고 안심한 것은 식후에 음료수도 안 사주는 쪼잔한 선임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인식일 수 있다.


물론 대리님의 속 마음은 이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실제로 일어난 일은 나는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대리님은 돈이 많이 남았다고 한 것이다. 정말 마시고 싶지 않아서 마시지 않겠다고 한 내 말을 마시고 싶지만 짐짓 사양하는 말로 듣는 게 대리님의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마시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가 사주고 싶어하기 때문에 마시는(마셔주는) 것이 내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주고 싶은 마음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그런 마음을 보여준 것으로 충분하다.


상대가 사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음에도 사주고 싶은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덮어버리는 것은 사주고 싶은 마음이 순수한 호의라기보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실현하고 싶은 욕심에 가깝다. 욕심은 있는 그대로의 말을 욕심에 맞게 변형하고 꼬아서 보게 만든다. 꼬아서 보기 때문에 의심이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아마 내가 끝까지 안 마시겠다고 했으면 자기를 무시하거나 혹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왜 사준다는데 저렇게 안 먹겠다고 하지? 나를 싫어하나? 나를 무시하나? 나는 그저 배가 부르고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런 순간이 자주 일어난다.


겉으로 보기에 작게 보이는 일이라도 소통하는 쌍방 간 엄청난 간극이 숨겨져 있다. 결국 모든 소통은 당사자 수 만큼의 세상이 만나는 일이며 겹치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 세상도 있다. 처음 보는 세상을 자기 세상의 규칙과 모양으로 쉽게 판단하고 있는 그대로 나의 세상을 보여줘도 그게 실은 그게 아닐 거라는 입장으로 바라보곤 한다. 일상에서 그런 입장을 캐치한 뒤 조목조목 이야기해줄 수 없는 노릇이다. 커피를 사주러 간 자리에 서서 

'나는 실제로 이런데 대리님은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네요.' 

'사주지 않으셔도 쪼잔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

'대리님의 욕심에 절 맞추려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결국 나는 토마토주스를 골라서 조금씩 홀짝거리며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평소에 '토마토주스'와 같은 방법을 생각해 낼 때도 있지만 때때로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는 순간도 온다. 그럴 때면 나는 냉정하고 단호한 사람이 되고 '나는 이렇다'라며 내 세상을 칼같이 들이민다. 목표랄까, 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방법이 없어서 칼을 들이대는 대신 '토마토주스' 같은 지혜를 품고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이다. 상대방에 내가 '맞춰 주는' 것 말고. 보통의 세상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듣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것만큼 큰 욕심은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실제, 있는 그대로 듣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드럽게 풀어나가는 지혜를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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