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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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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미 Nov 24. 2016

봄이 왔다

마지막 글 - 꿈같은 출산 후기

지난 3월 이후 우리 부부는 임신과 출산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해왔다. 기존의 시스템 중심의 출산과정에서 산모와 가족이 소외되는 게 싫었고, 출산이 고통과 위험으로 점철된 것으로만 여겨지는 인식이 불편했다. 조금 더 가족 중심의, 새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과 긴장이 있는 출산을 원했다. 물론 우리 부부 사이에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 비용이 비쌌고, 로터스 버스 같이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들이 있었다. 그러나 꾸준히 산모교실, 부모되기 교육 등에 참가하고 관련 다큐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해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자연주의 출산'을 지향했고, 나름의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봄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건강하고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무통주사나 유도분만제 같은 약물적 처치, 제왕절개와 같은 수술적 처치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필요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이다.) 산모와 아이, 가족과 의료진의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소통과 공감의 여정으로 임신과 출산을 바라보고 실천하고자 했다. 그동안 써온 '봄이 오면' 매거진의 글은 부족하나마 아이를 기다리는 아빠의 자연스러운 임신-출산 준비에 대한 단상과 기록들이다. 그중 마지막이 될 이 글은 출산 당일 일어난 일을 최대한 세세하게 적고 있다. 우리 부부의 소중한 기록으로, 위대한 생명의 탄생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또한 이 글은 아내의 임신 후 출산준비 교육과정부터 출산까지 모든 과정에 함께 해주신 장모님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모든 문장에 따로 지칭하지 않았지만 모든 과정에 장모님의 든든한 지지와 격려가 있었음을 이 글을 읽는 우리 가족과 모든 분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봄이 오면 매거진은 마감한다. 이제는 육아를 주제로 새롭게 아이와 교감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매거진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려는 목적과 주제는 같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공감과 소통의 여정을 떠날 것이다. 아내와 봄이와 함께. ^^


11월 19일 오전 5시, 다급한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오빠, 오빠, 나 양수 터졌나봐!"

다급한 듯, 떨리는 듯하기도 하고 둘 다 아닌 것도 같은 묘한 기운이 귀를 찔렀다. 그 기운에 어지간해서 한번 잠들면 깨지 않는 내가, 그것도 지난밤 이삿짐을 싼다고 2시에 자고, 한 주 내내 수면부족으로 헤롱 거리던 내가 벌떡 일어났다. 양수가 터졌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허둥지둥하는 행동이 빠르게 왔다. 얼이 빠진 듯한 아내의 얼굴과 욕실 바닥 맨발에 끈끈하게 느껴지는 투명한 액체를 번갈아보며 나는 어어어 버버버 모드로 돌입했다. 어떻게 해야 되지? 혼잣말 되뇌며 아내를 바라보다가 짐을 싸다가 옷을 입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다행히 지난주 출산 리허설 교육 때 저장해놓은 출산센터와 조산사 핫라인 연락처가 떠올랐다. 새벽이라 핫라인과 연결됐다. 약간은 졸린 목소리의 조산사님이 전화를 받아주셨고, 나와 아내 두 사람과 번갈아 통화하더니 아침 9시쯤 오시면 되겠다고 했다.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밥을 올리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원래 담당이었던 박수연 조산사님께 연락이 왔다. 아내의 설명을 듣더니 양수가 완전히 터진 게 맞다며, 12시간 이내에만 항생제를 맞으면 되니 그때까지는 충분히 진통 진행되도록 기다렸다 오라고 했다. 목소리 들어서는 아직 쌩쌩해 보이니 여유 있게 있다가, 오전에 잠도 자고 오라셨다. 그 사이 진통이 진행돼서 일찍 와야 할 상황이 되면 먼저 가고, 아니면 오후 3~4시 사이에 가기로 했다.

양수 터진 후 나온 이슬. 처음 봤을 때는 멘붕이었다.

한결 느긋해진 시간 덕에 우리 부부는 여유롭게 아침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겨울이라기에 영 어색한 포근한 날씨에 하늘은 가을처럼 무척 높고 맑았고, 공원에는 빨갛고 노란 단풍과 여전히 푸르거나 갈색이 된 잎사귀가 사이좋게 어울려있었다. 입고 나간 두꺼운 겉옷이 무색하게 조금 빨리 걷자 땀이 났다. 아내는 임신 초기 이후 가장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했다. 잠깐만 걸어도 숨차 하던 오르막길을 예사로이 걸었다. 태명처럼 봄 같은 날 오고 싶었나 보다, 근데 오늘 와야 말이지 내일부터 추워진다던데 이야기 나누며 초겨울에 선물처럼 찾아온 소중한 시간을 만끽했다. 


장인, 장모님이 집에 오셨고 그 사이 아내에게는 잠깐잠깐 자궁수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빠져나갔다. 간격은 일정치 않았고 아내는 생리통처럼 아프긴 한데 심하게 아픈 건 아니라고 했다. 이윽고 2시 반이 넘어 메디플라워로 향했다. 4시에 딱 맞춰 도착했고 바로 태동검사를 시작했다. 검사 결과 아직 본격적인 진통이 아니므로 입원해서 기다리거나, 다시 집에 갔다가 재방문하는 선택지를 제안했다. 다만 집에 갔을 경우, 양수가 터져 감염의 우려가 있으므로 8시간 간격으로 병원에 방문하여 항생제를 투여하고 그때 몸상태를 체크해서 입원 여부를 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일단 처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 파도가 거세졌다. 아내의 미간에 통증이 깊은 주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간격은 4~6분으로 여전히 들쭉날쭉했지만 주기가 생겼고 강도가 세졌다. 6시쯤 집에 도착해서 아내는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고양이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장모님이 닭죽을 했지만 먹지 못했다. 파도가 2~3분 간격으로 휘몰아쳤고, 아내는 속에서 으으 소리를 뱉어내고 후우우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배운 대로 아내가 으으 소리를 뱉을 때 골반 양쪽을 손바닥 밑 단단한 부분으로 꾹 눌렀다 후우우 숨을 들이마실 때 손을 떼었다. 이제 파도가 오면 아내는 말을 못했고, 파도가 지나고 나서야 다른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 정도면 가서 아픈 게 낫지 않겠나 의견을 맞추고 병원에 전화하니 이제 오셔도 좋다 했다. 


병원으로 다시 향하는 길은 본격적인 고통의 길이었다. 나는 아내 손을 잡았고 아내는 파도가 올 때마다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파도가 아내의 이성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메디플라워 출산센터의 한 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보니 205호였다. 그때는 이런 게 보이지도 않았다.) 방에는 침대 하나와 세면대, 욕실이 있었다. 조명은 은은한 불빛이 어둠을 살짝 밝히고 있었다. 강정화 조산사님이 우리를 맞아주셨고 바로 호흡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내가 격통에 호흡을 잘 잇지 못하자 일단 욕실로 샤워하러 가자신다. 아내는 옷을 다 벗고 욕실에 있던 밑에 뚫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샤워기를 들고 아내의 허리와 골반에 원을 그리며 따뜻한 물을 계속 뿌렸다. 그 사이에도 아내에게 거센 파도가 오고 갔고 아내는 너무 아프다며 괴로워했다. 중간중간 밑으로 자궁에서 나왔지 싶은 핏덩어리가 울컥울컥 개수구로 향했다. 아내는 질문해도 대답할 기운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중간에 계속 물을 조금씩 마시게 했고, 마셔야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욕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 몇 시인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내의 몸을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를 함께 느끼고 같이 호흡하며 매 순간의 파도를 넘는 게 중요했다. 아내는 고통이나 아픔을 잘 참는 편인데 이번에는 정말 달랐다. 이러다 정신줄을 놓는 건 아닌가 싶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파도가 왔을 때 마주잡은 손을 으스러지게 잡는 것에서 고통의 크기를 짐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고 아내에게 무통주사를 놓아달라는 요청을 해야겠다는 생각 등도 전혀 들지 않았다. 아내는 격통 속에서도 파도를 호흡으로 잘 넘겼고, 나는 비록 출구가 어디이고 언제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되겠다는 이유 모를 확신이 있었다. 파도의 절정에 다다른 시점에서도 어느 책에서 본 것과 달리 아내의 통증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게 아니라 5~10초 간격을 두고 일정하게 왔다. 거기에서 나는, 우리는 리듬을 찾았고 그 자리에 함께 한 장모님과 조산사 두 분 모두 한 팀으로, 한 가지 목적으로 함께 했다. 


돌아보면 격통 중에 리듬을 찾고, 호흡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함께 한 전문가 두 분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두 분은 아내가 자세를 모로 눕게 하거나, 똑바로 누워 다리를 당기게 하거나 다양한 자세를 이끌어주었고, 전문적으로 각 자세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강 조산사님은 시종일관 냉정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로 아내와 우리 팀을 이끌어주었다. 아내가 중간에 자궁 문이 얼마나 열렸나요, 저 잘 하고 있는 거 맞나요 등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질문을 할 때에도 잘 하고 있다, 필요한 만큼 열렸다라며 섣부른 기대도, 막연한 불안도 가지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다 출산 과정의 막바지에 그 침착하고 중립적이었던 조산사님의 멘트 하나가 아내에게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했다. 

"애기 생일이 19일이었으면 좋겠어요, 20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저 말은 생일의 선호, 길일을 따지는 말이 아니었다. 저 말을 한 건 11시 30분이었다. 즉, 앞으로 진통이 30분 안에 끝날 것이냐, 30분을 넘을 것이냐 하는 말이었다. 아내가 정신없는 와중에 잘 모르겠다고 하자 

"산모가 힘을 잘 못 줘서 20일에 낳을 거 같네"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는 저 말에 앞으로 최소 30분 이상 더 진통을 겪어야 된다는 게 너무 끔찍했다고 했고, 실제로 그 이후로 힘을 잘 주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출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징후들이 보이긴 했었다. 알 수 없는 기기들이 실린 카트들이 줄줄이 들어왔고, 아기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20일에 낳을 것 같다는 멘트에 이어 강 조산사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마법의 의자를 갖다 달라고 했다. 심상치 않았다. 드디어 뭔가 결착이 나려는구나 했다. 마법의 의자는 앉는 자리가 U자 형으로 되어 있어서 산모가 앉으면 아이가 밑에 빈 공간으로 나오는 구조였다. 아내가 의자에 앉았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내를 뒤에서 안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파도의 리듬으로 아내가 밀어내자 조산사님이 내게 밑으로 내려와 아이 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아... 드디어 봄이와 만나게 된다!


메디플라워 병원에서 출산하려는 부부는 4회의 사전 교육을 받고 출산계획서를 작성해서 병원에 제출한다. 4회의 사전 교육을 통해 출산 준비 및 출산 당일에 필요한 호흡, 이완, 의식 및 모유수유에 대한 강의를 듣고, 마지막 4회차 때는 출산리허설을 한다. 또 출산 과정 중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의료적 처치, 탯줄/태반 처치, 신생아 예방접종, 출산환경 등)에 대해 부부가 상의하여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최대한 반영해준다. 출산계획서에 적은 내용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아이를 받는 것이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이나 저항 없이 내가 아이를 받겠다고 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원했다. 내 인생에서 아이를 받아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직업 의료인도 아니고, 앞으로도 산과 관련 직업을 가질 것 같지 않으니 내가 아이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내 아이의 수만큼일 것이다. 그리고 첫 아이의 첫 탄생의 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아내는 종종 아이가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중에 성행위할 때 트라우마를 겪는 남편들 이야기를 들었다며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전혀 상관없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마법의 의자 밑에 앉아 거울에 비쳐 보이는 아내의 국부를 보는데 알 수 없는 신남, 들뜸이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까만 구체 끝단이 질 바깥으로 나와 있었고 그 주변의 음순들은 머리 모양으로 불룩 솟아있었다. 아내가 힘을 줄 때마다 머리가 나왔다 들어갔다 했고 옆에 있던 간호사분은 아이가 나오면 같이 받을 테니 준비하시라 했다. 준비하라는 말에 문득 이 방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가족과 의료진 모두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두 손을 아내 밑에 받치고 있는데 갑자기 아아아 어어어 하더니 머리가 쑤욱 빠져나오더니 주르륵 어깨부터 발까지 봄이가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봄이가 내 손에 안겼고, 나는 그저 웃음만 났는데 실제로는 마냥 웃지도 못하는 요상한 표정을 지었지 싶다. 11시 45분, 11월 19일에 봄이가 세상에 나왔다.


처음 만난 봄이는 팔다리가 길고 또 손가락 발가락도 길었다. 손톱이 어느 정도 자라있었고 머리카락은 반곱슬로 구불거렸다. 평균보다 크다던 머리는 골반과 산도를 통과하느라 콘헤드처럼 삐죽했고 말랑거렸다. 앙증맞은 고추가 달려있었고 쌍꺼풀은 보이지 않았다.(다음 날 부기가 빠지니 쌍꺼풀이 드러났다!) 젖꼭지도 제대로 있고, 항문도 잘 뚫려있었다. 온몸이 빨갛고 군데군데 태지가 있었다. 배꼽에는 하얗고 불투명한 탯줄이 달려 있었고 아직 나오지 않은 아내 뱃속의 태반과 연결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무거웠고, 생각보다 훨씬 이뻤다. 봄이는 곧바로 아내의 가슴 위에 놓였는데 나온 직후와 달리 아주 조용했다. 까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가만히, 그리고 꼬물거리며 엎드려있었다. 무엇을 살피는지 알 수 없는 눈을 보며 나는 이것이 탄생이고 생명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저 큰 애가 정말로 아내 뱃속에서 나온 건가 하늘에서 떨어진건가 어어어 벙벙벙했다. 


그러고 반쯤은 정신줄을 놓고 있는데 어느새 정환욱 원장님이 들어오셔서 100점짜리 출산이라고 축하해주셨다. 원장님은 태반을 꺼내고 높이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봄이와 아내 사이에 영양분을 주고받게 해 준 태반은 크고 붉게 빛났다. 태반에는 봄이가 35주간 지냈던 양막이 붙어있었다. 봄이가 깃들어있던 몸의 구체적 실체를 마주하는 신비와 감동이 있었다. 출산계획서대로 로터스 버스(Lotus Birth)를 위해 태반을 고스란히 보관했다.  

태반과 함께 ^^


봄이는 나오자마자 아내의 가슴에 놓였고 이어 벗은 내 상반신 위에도 놓였다. 꼬물거리는 봄이의 팔다리, 손발이 느껴졌고 나는 말없이 기뻐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나도 저런 표정이 있나 싶은 멜랑꼴리한 얼굴이 낯설었다. 키와 몸무게, 머리둘레, 손가락, 발가락, 배꼽, 항문, 젖꼭지 등등을 점검하고 마침내 우리 가족들이 남았다. 원장님과 병원 직원분들이 사진을 찍어주고 축하해주었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셀카도 찍었다. 참 기쁜 날이었다. 

봄이와 첫 접촉


출산 다음 날에는 금줄도 달았다. 메디플라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원장님과 직원분들이 신기해했다.

그런데 출산의 기쁨과 후련함도 잠시, 우리는 곧바로 육아의 세계에 돌입했다. 아이는 밤새 자다 젖을 찾았고 때때로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우리에게 토요일 밤, 일요일 새벽은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배움과 거쳐나가야 할 미션의 세계였다. 출산이라는 정말 큰일이 끝났는데(그것도 잘 끝났는데) 푹 잠을 못 잔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이런 나날이 이제부터 매일 시작된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비몽사몽간에 첫 밤을 보내고 나니 새삼 아이를 낳았고 또 키우는 모든 선후배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아이를 챙기는 게 부모구나, 아기 얼굴을 보니 또 절로 그렇게 되는구나 알아졌다. 

엄마와 아들

그래, 이런 게 생명의 힘이다. 힘들고 피곤할지언정 새 생명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서 걸어간다. 그게 가장의 길이고 아빠의 길이다. 내 아빠가, 아내의 아빠가 걸어온 그 길, 이 세상에 수많은 아빠들이 따로 또 같이 걸어간 길이다. 이제는 내가 걸어갈 길이다. 봄이 왔으니 이제 부지런히 일하고 물을 주고 빛을 줘야 한다.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때문에 어떻게 그 길을 걸을지, 또 걸으며 무엇을 발견했는지도 잘 살펴야 한다. 봄이 아빠 시즌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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