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10편
환상과 현실 속, 사랑과 이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왔다. 제목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인터넷에 찾아본 바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프리퀄이라고 했다―책을 읽고나서 프리퀄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설렜다. 드디어 그의 신작이 나온다니. 하지만 설레는 마음과 달리 나는 신작을 곧장 주문하지 않았다. 왠지 망설였다. 곰곰 생각해보니 설레기만 한 게 아니었다. 나는 하루키 씨의 신작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얽힌 두려움이었다. 하루키 씨는 나에게 영웅과도 같은 존재다. 나는 그의 소설에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이른바 하루키 월드에 깊숙이 빠져든 것이다. 만약 그의 신작에 또 매료된다면 나는 하루키 월드에 더 깊이 빠져버릴 것이다. 자칫하다 내 예술 세계가 무라하미 하루키의 아류가 될 수 있다. 반면 신작이 실망스럽다면 그것도 문제다. 여태까지 내가 사숙했던 선생 하루키가 무너지는 모습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처럼 나에게 이중적인 존재다. 애틋하면서도 미운 작가다. 어찌됐건 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고 마침내 다 읽었다.
이야기의 구조가 조금 복잡하기에 전체 상을 짚어보려 한다. 이 소설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17살의 “내”가 “너”와 함께한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도시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가 교차한다. 2부는 본체와 그림자가 나뉜 다음, 바깥 세계에서 생활하는 나의 이야기고 3부는 도시 안에서 생활하는 나의 이야기다. 1부에서 과거 회상과 도시의 이야기가 병렬로 서술되어서 두 가지 서사가 시간상으로도 동시에 진행된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 내가 도시에 들어가게 된 시점은 45살일 때다. 이 부분을 명확히 알아야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내가 궁금했던 건 이것이다. 왜 중년이 되어서야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나”는 늘 그녀를 만나러 도시에 들어가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특히 그녀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도시에 들어가기를 절실하게 바라지 않았을까. 원하기만 하면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작중에 그녀가 말했던 것 같은데. 해당 구절을 찾아내서 나는 다시 읽어보았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다시 읽어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45살이 되어서야 도시에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도시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시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일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겁을 먹었던 게 아닐까 싶다. 현실 세계에 있는 그녀는 대역이고 진짜 그녀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했다. 만약 “내”가 도시에 들어간다면 진짜 그녀를 마주해야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는 게 쉬운 일일까? 그녀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봤을 때 혹시 가슴 아픈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실 말이다. “나”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두려워서 도시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며 살아왔던 것 아닐까. 그렇게 28년이 흘렀고, 그제서야 “나”는 두려움을 걷어내고 비로소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1부의 결말에서 “나”는 그림자와 함께 도시를 떠나려고 한다. 뿔피리를 훔쳐서 시간도 끌고 눈밭을 헤치고 나와서 마침내 우물을 발견한다. 그런데 본체인 “나”는 막판에 마음을 달리 먹는다. 그림자인 “나”에게 우물로 나가라고 하고 자신은 여기에 남겠다고 한다. “나”의 본체와 그림자는 작별하고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 2부는 우물을 통해 현실 세계로 빠져나온 “나”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3부는 우물로 나가지 않고 도시에 남은 “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3부의 결말이자 소설의 결말은 도시에 남은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 바깥의 “나”와 하나가 된다는 내용이다. 도시에서 생활하던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이제 여기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진한 여운을 느낀다. 바깥세상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려 한다는 의미다. 마치 태양에 타버릴 것처럼 강렬했던 사랑을 추스르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렸는가.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도시에 들어가고 싶어했고 결국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녀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걸 안다. 화상을 입었던 마음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빠져나오는 게 “내”가 “너”와 함께한 기억을 지운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와 함께한 기억이 “나”의 마음속에서 완결되었다는 뜻이다. 진정한 의미로 이별하려는 마음이다. 흔히 이별이라고 하면 일차적으로 고통을 연상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누군가와 진정한 의미로 이별하게 된다면 슬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그와 함께한 과거를 기억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가 사무치게 그립다면 눈물을 약간 흘리면서 말이다. 아마 “나”도 현실로 나왔을 때 “너”를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눈물을 약간 흘리면서 말이다.
어쩌다보니 도시에 들어가고, 나온 사건만을 다루게 되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도시 안에서의 서사와 현실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서사에 대해 글로 적자니 분량이 길어지기도 하고 다른 독자의 상상을 방해하는 꼴이 될 것 같다. 굳이 어떤 서사나 인물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독자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하루키 씨의 신작을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정확히는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두려웠다. 소설을 읽고 난 지금, 나는 그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하루키 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다만 나는 소설을 읽으며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하루키, 나는 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루키 씨에게서 벗어날 때가 온 것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마치 소설 속 “내”가 “너”에게 진심을 담아 안녕이라고 말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말이다. 나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작별을 고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