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존을 위한 창의력을 보여 준 로빈슨크루소상
방구석 공모전 당선작 에세이 부문 / 로빈슨크루소상
홀로 무인도에 갇혀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한 <로빈슨크루소>에 버금가는,
방구석 생존을 위한 창의력을 몸소 보여 준 작품에 주어지는 상입니다.
호화로운 방콕 여행
글_ 권민아
소란스러운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도착한 이곳은 방콕 시티.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도심 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2주일 동안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 약간의 불편한 마음을 채우려 틈틈이 영어 공부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안 한 것과 다름없었기에. 나는 그저 휴가를 즐겼다고 남겨 본다.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드라마, 영화 다시 보기 앱의 월정액을 구매한 뒤, 그동안 보지 못한 밀린 작품들을 몰아 봤다. 여러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 보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다.
그런데 잠시 다른 세상에 빠져 있는 동안, 현실 세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방콕 시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잠시 여유를 준다는 의미에서 행복이라 생각했지만 결코 온전한 행복은 아니었다. 자발적 방콕 여행과 강제 체류 여행은 다른 법. 그렇게 나는 방콕 시티에서 무기한 체류자로 남게 되었다.
‘내가 방콕을 떠날 수 없다면, 방콕에 원하는 것을 들여오자’는 사소한 생각의 전환으로 나의 생활은 한결 풍성해졌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주방을 편의점으로 만들어, 간편식과 간식, 음료를 채워 둔 연예인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나의 방콕 시티에도 편의점이 생겨났다. 나는 편의점의 점주이자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손님이었다.
간편식에 지칠 무렵, SNS에는 지인들이 만든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올라왔다. 그렇게 나 역시도 초고급 레스토랑의 주인이 되었다. 주방장이 되어 요리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유튜브 창작자와 다름없었다. “얼마나 맛있게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유행어를 내뱉고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반려묘의 시선에 피식거리기도 했다. 차려진 요리를 먹을 때면 재벌가의 우아한 막내딸이 되기도 했다. 잘 쓰지 않던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미슐랭의 레스토랑에 온 듯 예의를 갖추며 “음… 괜찮네요”라고 말하며 먹었다. 그러나 그 끝은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폭식하는 장면으로 넘어가곤 했다.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꼭 단 게 땅긴다. 요즘 홈 카페가 유행이란다. 방콕 시티에도 카페가 빠질 순 없지. 나는 요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베이킹까지 넘보기로 했다. 에어프라이기에 종이 포일을 깔고 백만 번을 저은 머랭을 넣었다. 큰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완성되길 기다리던 나는 미처 몰랐다. 그 가벼운 머랭이 에어프라이기 천장에 달라붙어 나를 끔찍한 뒤처리의 늪으로 데려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머랭 치기를 포기했다.
나의 방콕 시티는 시간이 거듭날수록 호화로워졌다. 편의점, 레스토랑, 카페까지 기본적인 식욕을 충족시켜 줄 것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무료함이 가시질 않았다. 무료함은 월정액 서비스로는 부족했다. 온라인에서 싸구려 물감과 붓, 스케치북, 팔레트를 샀다. 방콕 시티에 미술 학원이 생겼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향하던 붓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냈다. 기하학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이 담긴 예술이랄까. 그 예술 활동은 딱 5일치의 가성비였다.
우울증에 걸릴 듯 외로워지면서 ‘현타’가 찾아 왔다. 의미 있는 활동을 찾기 시작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 아닌가? 온라인 서점으로 책을 구매했다.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조원재 작가의 『방구석 미술관』 등. <효리네 민박>에 나온 아이유처럼 여유롭게 읽을 생각이었는데, 결국 이 책도 아름다운 전시품으로 남게 됐다. 방콕 서점은 현재 휴업 상태이다. 휴업이다, 휴업. 언젠간 다시 열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어려워도 쓰는 건 재미있지 않을까? 글을 쓰기로 했다. 블로그 활동을 재개했는데, 그다지 큰 활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돈이 걸리면 더 열심히 하지 않나?’라는 생각에 공모전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막상 공모전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멋진 글을 쓸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저 아마추어일 뿐. 쉽게 도전할 만한 게 없을까? 찾다가 ‘방구석 공모전’을 발견했다. 그래, 이거다!
방구석 시네마, 방구석 편의점, 방구석 레스토랑, 방구석 카페, 방구석 화방, 방구석 서점… 그리고 방구석 공모전. 나의 방콕 시티는 그 어느 곳보다 화려했고 호화로워졌다. 살아갈 인생에서, 이런 여행을 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마지막 눈이 내리고, 벚꽃이 피었다 지고, 꽃샘추위가 나에게 안녕을 고한다. 날이 따뜻해지는 것을 보니, 나의 방콕 여행도 끝나가나 보다. 지난 여행의 순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다. 세상 최악의 순간을 호화로움으로 바꾼 순간들을.
“소란스러운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도착한 이곳은 방콕 시티…….”
*언유주얼 '방구석 공모전' 에세이 부문에 당선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