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공존할 것만 같은 곳
혼자였다.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보다 앞서 이곳에 머물던 사람 모두가 입을 한 데 모아 같은 말을 했다. '바라나시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라고. 나는 찾아갔다. 아무것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흘러줄 시간에게. 꼭 무엇을 해야만 보람되다 말할 수 있는 그런 하루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었으므로, 특히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데 섞인 생과 사의 정류장 같은 곳인 바라나시였으므로. 그곳에서는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묵인해 주었다. 마법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시간은 잘도 흘렀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갠지스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라씨나 짜이를 주워 마시다가 동네 꼬마들과 사진을 찍고, 또 밥을 먹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면 태양은 어느새 서쪽으로 물러났다. 테라스에 놓아둔 나의 간식을 원숭이들이 집어간다 해도 문제 될 것 없었다. 다음 날 원숭이들은 사과의 의미로 티셔츠 한 벌을 내 테라스에 던지고 갔으니까. 나는 티셔츠의 주인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감사히 그 옷을 입고,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셔츠의 주인 역시 바라나시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을 터였다.
어느 날은 경찰의 호위까지 받아 수고스럽게 극장을 찾아서는 신명 나는 발리우드 영화를 보았고, 또 어느 날은 온통 주황으로 물든 어마어마한 인파에 싸여 축제를 구경했다. 미로처럼 이어진 시장 골목골목을 헤맨다 해도, 내가 온 길을 되새기지 않는다 해도 걱정이 없었다. 물 비린내 나는 방향을 찾아 물가로 나가기만 하면 금세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강변에 위치한 마을이란 그랬다. 길치도 제 집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관대한 곳이었다.
사람이 죽어서 돌아오는 곳이었다. 이곳을 거쳐 사후 세계로 간다고 했다. 인도인들에게는 죽은 뒤 갠지스 강변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라 했다. 시신을 화장하기 위한 나무는 비싸다고, 그래서 부자의 시신은 많은 나무와 함께 오래오래 화장시킬 수 있지만 가난한 이의 시신은 채 다 타지 못한 채로 강변에 버려진다고. 많은 여행자가 놀란다고 했다. 미처 다 수습되지 못한 시신의 일부를 동네의 개들이 물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배고픈 개의 식사가 되어주는 어떤 이의 생의 마지막은 그다지 쓸모없는 일은 아닐 거라 위안했다.
샛노란 옷을 곱게 입은 참해 보이는 시신을 보았다. 젊은 여성일 것이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젊음이라 한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하지만 나는 그 죽음의 깊이를 알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어서 여기로 돌아왔지만 산 사람들은 행복했다. 너도 나도 행복해 보였다. 그런 역설이 한 데 모인 곳이 바라나시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공존할 것만 같은, 어쩌면 지구의 시작과 끝이 이곳에 머물 것 같은 미지의 공간.
인도에서의 5주를 통틀어 가장 오롯했던 시간, 아무것 하지 않았음에도 그토록 선명할 수는 없던 시간을 나는 그곳에 두고 왔다. 언젠가의 서울에서는 바라나시의 물 비린내가 났고, 나는 후각을 통해 그 시간을 복기했다. 그래서 나는 머지않은 어느 날에 다시 그 시간을 찾아오기로 결심한다. 서울의 시간은 바라나시와 달리 너무나 정직하게 흐르고, 때로는 그 정직함에 주눅들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