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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Apr 19. 2016

자이살메르, 모래성으로 지어진 마을

감각으로 기억되는 도시

 이살메르는 감각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곳을 생각하면 온통 노랗고 뜨겁고 건조한 모래와 그리고 그 모래를 닮은 공기가 떠오른다. 사막의 도시였다. 많은 여행자들이 사막 사파리를 목적으로 이곳에 모여들었다. 여행자들은 인도의 다른 도시와는 조금 다른 '뜨거움'에 화들짝 놀랐다. 쪼리 하나에 의지해 씩씩하게 여행을 하던 발은 대낮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총총 뛰어다녔고, 태양에 노출된 피부는 금세 붉게 그을렸다. 혹서기의 자이살메르에서는 그 누구도 태양이 내리꽂는 빛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곳은 이집트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사막'이란 이름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언덕 위에 지어진 자이살메르 성이 있다. 먼 과거에는 왕과 귀족이 살았을 그 성에는 식당과  상점과 민가와 숙박업소들이 현재를 채우고 있다. 시간은 무상히도 성의 주인을 바꾸어놓았고, 무상한 세월의 수혜자인 우리는 성안의 레스토랑에서 인도에서 가장 맛있는 라자냐를 먹었다. 나를 포함해 남자 넷, 여자 둘로 이루어진 자이살메르 여행 동반자들은 금세 가까워졌고, 우리는 매일 밤 미적지근한 맥주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맛있는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최고의 김치 볶음밥, 삼계탕, 칼국수…. 이곳에서는 굳이 외국 여행 중에 한국 음식을 사 먹는 일이 용서되었다. 우리의 게스트 하우스에는 '가지'라는 이름의 지상에서 가장 선한 셰프가 요리를 했고,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유창하게 하면서 고급 개그까지 던지는 사장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사막을 향해 지프를 타고 달렸다. 사방은 황량했다. 지프에서 울려퍼지는 음악과 열린 창으로 들이닥치는 바람은 상쾌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우리는 낙타를 한 마리씩 골라 타고 인솔자의 안내를 받아 뙤약볕 아래 벌판을 하염없이 걸었다. 장신의 낙타를 올라탈 때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포에 질려 죄 없는 낙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면 '원빈'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12살 남짓의 현지 인솔자 소년이 "누나 갠짜나?"라는 정확한 한국 말로 나의 안위를 걱정해 주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나에게 학대당한 건 낙타였는데 나는 그 귀여운 머리를 쓰다듬어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다시는 여행 중에 동물로 오락거리를 즐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오아시스의 그늘에 모여 휴식을 취했다. 낙타는 한가로이 풀을 뜯었고, 우리도 인솔자가 만들어준 카레로 식사를 했다. 다들 더운 날씨에 입맛이 없었지만 나는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그리고는 한국 돈으로 환산해 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 돈에 벌벌 떨며 '인생 뭐 있냐, 콜라 하나 마시자!'라고 호기롭게 콜라를 마셨다. 오죽했겠는가. 사막 한가운데까지 그 냉기를 유지하며 긴 여행을 했을 콜라는 조금 비싸도 내 생애 가장 시원하고 맛있는 콜라였는 걸.



 뉘엿뉘엿 해가 서쪽으로 물러날 때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함께 여행하던 남자들은 우아한 곡선의 사구를 보자마자 그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모래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내려 갔다. 사방 천지에 귀엽게 기어 다니던 쇠똥구리마냥.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런저런 장난과 수다와 함께 사막의 밤은 깊어졌고,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모닥불이 지펴졌다. 불가에 둘러앉은 우리는 불에 비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두런두런 치킨을 나누어 먹었다. 



 "사막에서의 하룻밤은 꽤 길다. 한참을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뜨고 하늘을 바라보면 별똥별이 떨어진다. 내 옆에 누운 누군가는 잠든 척하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누군가는 팔 굽혀 펴기를 하며 몸을 다지고, 다른 누군가는 함께 화장실에 가자며 잠들락 말락 하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휴지 심부름은 덤이다. 이렇게 쏟아지는 별을 덮고 긴긴밤을 보내다 보면 다시 어둠은 깊어진다. 신나게 짖어대는 사막의 개들을 위해 '쟤가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한 번 해주고도 잠이 오질 않아 이 사람, 저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옆집 아저씨, 우리 할머니, 삼촌, …,8살 때 짝꿍까지 모조리 다 기억해 내다보면 어느덧 사방이 밝아온다. 내가 아는 사막의 밤은 불면의 밤이다. 그토록 많은 별 때문일까. 아침 일찍부터 그토록 고생을 하고서도 쉽사리 잠들 수 없는 그런 밤이다."



 저 멀리서 여명이 비춰왔다. 사막에서의 하룻밤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곳에서 잠들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무리였을 것이다. 우리는 사막에서 돌아온 날 마지막 만찬을 나눈 뒤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한국으로, 누군가는 바라나시로, 누군가는 북쪽으로. 나와 동행은 기차를 탔다. 자이살메르의 기차를 먼저 겪어 본 여행자는 곧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기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그 말대로 미세한 모래 바람이 나의 값싼 슬리퍼 클래스 객실로 진격해왔다. 기차의 모든 창과 문을 닫아도 소용없었다. 나는 금세 거지꼴이 되었고, 옆 칸의 에어컨 객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내 모습과 대조적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우아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역무원에게 쫓겨나 원래의 슬러퍼 클래스로 추방당했고, 다음 목적지까지 계속해서 입 안의 모래를 잘근잘근 씹어야 했다. 자이살메르를 지나는 기차 안에서의 계급이란 이토록 노골적인 것이었다. 



 그 봉변을 겪고 난 뒤의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 마술 같은 시간이 찾아왔다. 창 밖의 색이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노랑, 주황, 다홍…, 끝내는 빨강. 차창 밖은 무대 조명을 쏜 것처럼 시시각각 변화했다. 초현실적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내 시야 닿는 곳에는 파란 하늘이 있었는데, 지금 내게 보이는 것은 온통 빨강이었다. 모래 바람과 석양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을 것이다. 사막 도시의 뜨거움도,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맛있던 한국 음식도, 다른 여행자들과의 교감도, 호텔에서 만난 스탭들과의 인연도, 칠흑 속에 별이 송송 박혀 있던 사막의 밤도 모두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롱했다. 그 순간도 나는 여전히 꿈속에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정말 그곳에 있었던 걸까 싶은 의심이 들 때, 나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필름에 새겨진 이미지보다 더 확실하게 그 시간을 환기하는 것은 내 몸에 배인 감각들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 종종 자이살메르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장 먼저 뜨거움을 동반한 건조함이 훅 끼쳐오고, 사막에서의 밤에 들려오던 이런저런 소리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냄새, 함께 나누었던 음식의 맛, 그리고 기차 객실 안에서의 매캐함과 점차 붉어지던 창 밖의 풍경이 차례로 나에게 밀려온다. 그리고 끝내는 발바닥이 뜨거워지고, 까슬까슬한 모래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록 그곳은 모래로 이루어진 도시였지만, 내가 본 것은 결코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곳은 감각의 성, 감각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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