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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Jun 30. 2016

내 삶의 배경이 되어 주어 고마워

큰 챕터 한 장이 접혔다

큰 챕터 한 장이 접혔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아일랜드에서 311일의 오늘을 살았고, 이제는 고작 하루의 반절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얼마 전부터 내 한국 이메일함은 장기간 로그인을 하지 않아 내 계정을 휴면으로 전환한다는 메일이 쌓이고 있다. 그만큼이나 시간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 악명 높음은 익히 들어왔기에 알고 있었지만, 정말 시간이란 너무나도 무자비하다. 나이가 들수록 그 빨라지는 속도에 질겁을 하지만, 딱히 대항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항상 내가 원해서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타곤 했지만, 항상 떠날 때는 이미 짜여진 계획과 현실적인 장벽에 떠밀려 돌아가곤 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그런 기분이 든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한 뒤 스스로 결정한 일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은 많은 것이 마음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자의 반 그리고 타의 반으로 다시 짐을 싸서 떠난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버려야 할 것이 많다. 결국 다 두고 갈 것들에 나는 왜 그리도 애착을 가졌는지 싶지만 이내 깨닫는다. 왜기는 왜겠어. 다신 못 볼 것들이니 그랬겠지.



이 마음도 내 안에서 꺼내 쇼핑백에 잘 담아 아일랜드에 맡기고 가면 좋겠지만 그건 안 될 것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이 마음을 이고 지고 다니게 될 것이고, 어쩌면 몇 달 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어딘가에 버리지 못한 그 마음이 나를 가만 쳐다볼지도 모르겠다. 각인된 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위에 무언가를 덮어버린다 해도 자국은 남아있을 텐데, 훗날 그 자국을 다시 발견했을 때 세월의 흔적에 예쁘게 풍화된 모습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왕 생겨버린 자국, 까짓 거 잘 들여다보면서 예쁘게 다듬어 주지 뭐.



한 곳을 떠나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굉장히 심각하게 그곳을 그리워하는 성미의 나다. 떠나기 직전의 지금 이 순간은 의외로 덤덤하지만 실은 이후의 일이 두렵다. 거닐던 거리와 좋아했던 장소들, 만났던 사람들, 사소한 습관들, 심지어는 공기와 습도와 모든 냄새들이 물밀듯 닥쳐올 것을 안다. 고작 10개월이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 이국의 공간에 진득하게 지내 본 적은 없기에, 그 후환이 얼마나 클지 나는 감히 가늠조차 못하겠는 걸.



어쨌거나 내 이십 대 후반 10개월 동안의 삶이 여기에 있었고, 내가 존재했던 배경에서 나만 똑 떼어내 이곳을 떠난다. 내가 없는 이 곳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 해가 뜨고 비가 올 테고, 누군가는 캐리어를 끌고 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할 테지. 그래도 아주 가끔이나마 나를 그리워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고, 아주 작게나마 내 흔적에 나를 떠올려 주는 이들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난 간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지 의외로 덤덤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떠나. 수고가 많았다 모두. 이 곳에서 느끼고 품었던 마음들, 눈에 담은 수많은 풍경들 나도 최대한 오래 기억해 보려고 애를 쓸게. 아마 애쓰지 않아도 그 모든 감각이 범람해 주워 담기 바쁘겠지만, 때로는 눈사태처럼 몰려와 아무 손도 쓰지 못한 채 압도 되기도 하겠지만.



사랑하고

미워했어, 아일랜드.



대부분의 시간동안은 그저 멍을 때리기 바빴지만, 때로는 뜨거워서 데일 것 같았고 또 차가워서 에일 것 같았어. 내 삶의 배경이 되어 주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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