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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Jun 28. 2016

내 삶을 흩뿌리던 곳을 떠나며

어떤 사람들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

지난 주말, 아마 평생 마지막일지도 모를 방문을 했다. 그리고 평생 마지막일지도 모를 만남들을 가졌다. 그렇다. 더블린에 다녀왔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삶의 배경이었던 곳,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 4개월 동안에도 내 삶의 진짜 배경이었을지도 모르는 나의 애증 서린 도시에.



아일랜드에서의 첫 집. 아일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정착해 6개월 동안 많은 추억을 만들고 재미나게 살았던 아파트의 거실에서 잠을 잤다. 늘 보아온 광경이었다. 수도 없이 많은 카우치 서퍼들이 더블린에 여행을 와서 거실에서 머물다 갔고, 그 집에 살던 수많은 이전의 플랫 메이트들도 정든 방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고는 거실에서 머물다 제 고향으로 떠나곤 했다. 그리고, 내 차례였다. 나 또한 다른 37 Bow street 일원들처럼 이 나라를 떠나기 전 거실에 짐을 풀고 늘 남들이 자는 걸 보기만 하던 그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청했다. 기분이 묘했다. 나에게도 어김없이 차례가 돌아온 것이.



/



1. 선생님


몇 달 전에 등록해 둔 영어 시험을 치러 학교에 가서는 마지막 선생님을 만났다. 대화가 잘 통한다 생각했던 분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와 나는 그 선생님과 담배를 피우며 짧은 시간이나마 나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게 비록 영국인의 겉치레 예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늘 나와 친구를 응원해 주시던 분이었고, 선생님으로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던지라 감사의 선물로 내가 만든 사진집을 한 권 드렸다. 기분 좋게 받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 사랑


스미스필드의 아파트에 돌아와서는 너에게 연락을 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5분 거리의 맞은편에 사는 너와 나였다. 너는 나를 보러 나의 아파트로 와주곤 했고, 나 또한 너의 집에 쥐새끼처럼 숨어 들어가 밤을 지새우고 나오곤 했다. 일주일 전 나는 너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너는 최초로 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어차피 남인데 싶었지만 내가 이 나라를 영원히 떠난다 생각하면 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내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너는 득달 같이 집 앞으로 달려왔다. 정말로 여생을 통틀어 너를 만나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나는 치마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더블린에 올라갔다. 네가 메일을 확인하는 것을 기다리느라 밤 11시까지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있었다. 너는 여전히 멍청했다. 내 손목의 타투와 원피스, 립스틱을 보더니 내가 달라졌다고 말하며 속상해했으니까.



사진에서 보는 너와 물리적으로 마주한 너는 늘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너의 얼굴을 정확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너의 얼굴을 실제로 마주할 때마다 항상 처음 보는 얼굴인 듯 생소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너의 얼굴을 가만 올려다보며 '아, 이렇게 생겼었지.'하며 그저 신기해했다. 부질없고 쓸 모 없게도 내 눈에는 여전히 청초하고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6개월 동안 너는 나를 항상 화나게 했고, 나는 너를 항상 슬프게 했다. 그중에서도 너의 마지막 모습은 내가 본 중 가장 슬픈 모습이었다. 나는 결국 너를 웃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포옹에서 너의 냄새를 맡았다. 언젠가 먼 훗날에 아주 갑작스레 엉뚱한 장소에서 이 냄새가 훅 끼쳐올 것이고, 무방비 상태의 나는 너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될 테고, 그러면 나는 이역만리 너머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리고는 잠시 동안은 울적하게 될 것이다.




3. 게이 친구들


다음날 LGBT 퍼레이드가 있어서 더블린은 전국에서 모여든 게이와 레즈비언들로 가득했다. 새로 들어온 플랫메이트도 게이였다. 마초 같이 생겼으나 퍼레이드에 입고 나간다며 신나게 바지에 전구를 꼬매고, 수염도 무지개 빛으로 염색을 하고, 심지어는 무지개 빛 콘택트렌즈도 사 왔더라. 왜 귀엽고 센스 있는 남자들은 다 게이인 걸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 게이 남자들은 정말 최악이라고. 나도 말했다. 스트레이트 남자들도 최악이라고. 결국 남자들은 다 최악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렀으나, 게이든 스트레이트 여자든 모두 남자의 몸을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결론을 다시금 도출할 수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플랫메이트와 밤에 맥주를 한 잔 하러 나갔다. 전국의 LGBT들이 아주 신나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는 늘 나의 옆구리를 꼬집고는 했고, 같이 걸을 때면 나는 늘 친구의 팔에 내 팔을 감고 걸었다. 친구가 나를 돌덩이나 각목처럼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구에게도 내 책을 한 권 주었고, 사실 처음 내 책을 보여 줬을 때부터 너무 맘에 들어서 내가 한 권 선물해주길 기대했는데 코크로 떠날 때 그냥 가버려서 아쉬웠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행복했다. 앞 장의 편지를 읽고 좀 울었길 바란다.




4. 할아버지


더블린 생활 초기에 시네마테크에서 한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부인과 사별하고 주로 그곳에서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시는 분이었다.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히 늘 반갑게 인사를 하며 대화를 하게 되었고, 함께 산책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금요일 오후, 옷을 차려입고 친구가 일러준 곳에 이력서를 내러 가는 길에 극장 앞에서 우연히 할아버지를 만났다. 커피를 한 잔 하겠느냐 물으셨지만 볼 일이 있다며 거절을 했다. 근데 뭐, 이력서 내는 데 2분이나 걸리나. 금요일 오후에 옷을 차려입은 상태로 다시 집에 돌아가려니 기분이 울적해져 차나 마시고 가야겠다 생각을 하고 다시 극장에 갔다. 할아버지와 차를 한 잔 하고, 동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건널목에 서서 말했다. "아이고 할아버지, 제 인생 뭐 없네요. 저 채용해 주는 알바 자리도 없고, 금요일 저녁에 약속도 없어요." 할아버지는 나를 초대해 주셨고, 함께 와인을 한 병 사서 할아버지의 집에 갔다. 그리고 금세 깨달았다. 그것은 호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민망한 상황을 정리하고자 할아버지의 책장에서 동화책을 한 권 빌려 급히 나왔고, 할아버지는 거듭 사과하며 나를 큰길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할아버지를 다시 보기가 민망해 한동안 극장에 발길을 끊었다. 한 일주일 간은 기분이 굉장히 언짢았던, 아주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일화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후 다시 극장을 찾게 되었을 때는 늘 그곳에 계시던 할아버지를 통 볼 수 없었다. 책을 돌려드리고 싶었고, 워낙 연로하신 분이라 혹시 돌아가신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도 들었다. 이상하게 궁금했다. 살아 계신 건가, 돌아가셨나. 더블린에 올라오면서도 생각했다. 결국 풀지 못한 의문을 남기고 나는 아일랜드를 떠나는구나 하고.



그런데. 퍼레이드가 끝물인 시티에 나와 친구와 서있는데, 멀찍이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할아버지였다. 시간이 많이 흘러 훨씬 연로한 모습이라 긴가민가 했지만 이내 확신이 들었다.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갖다가 내가 먼저 다가갔다. "우와, 신기하네요. 저 오늘 더블린 마지막 날이에요. 목요일엔 다른 나라로 떠나요. 잘 계시는지 궁금했어요. 극장 자주 갔는데 한 번도 못 뵈어서요. 더블린 마지막 날에 이렇게 우연히 뵙다니 정말로 신기하네요."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말씀을 하다 내게 사과를 한 번 더 하셨다. 그리고 비쥬를 하고 악수를 하고 자리를 떴다. 사람의 인연이란 무얼까 생각을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맘에 걸리던 사람을 이렇게 마지막 날 우연히 보게 되다니. 풀리지 않던 매듭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



먼 훗날에 시간이 흐르면 나는 더블린을 그리워할 것이다. 비록 '더블린은 작고, 취향도 없고, 뭘 해도 시시하고, 술주정뱅이만 그득한 더러운 도시'라고 항상 불평을 했어도 결국엔 내 삶이 있던 곳이니까. 그 삶은 비록 처음부터 유한하게 정해져 있던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곳에서 늘 뜨겁고 애틋했으니까.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지루하고 우울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났고, 사랑을 했으며, 난생처음 영어가 재밌다고 느끼며 공부를 했으니까.



나는 쉬이 변치 않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이국의 도시를 온 힘을 다해 그리워하는 나이니, 조만간에 나는 더블린을 애타게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음에 슬퍼질 것이다. 곳곳에 서린 나의 마음들과 우리의 발자국을 떠올리며 나는 문득 울컥하는 마음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지. 어떤 것들은 그저 기억 속에서만 아름다울 것이라는 걸. 다시 돌아가는 일,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감사한 일이다. 아마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한 기회로 더블린을 다시 찾게 됐을 때 더블린 어디에서도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 나뿐 아니라 '우리'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모든 이들의 어린 시절도 함께 흩뿌려져 있으리라는 것. 나는 이처럼 세상 곳곳에 이십 대의 나 자신을 남겨두며 다니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더 이상 젊지 않은 내가 지금의 불안하고 울적하고 그러나 늘 뜨거웠던 나를 다시 주우러 올 수 있길, 그 모습을 보고 나의 어린 시절은 참 예뻤구나 하고 새삼 생각할 수 있길 염원한다. 비록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거나, 결국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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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가 말했지.

"Some people are unforget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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