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짐을 싸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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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한국에 있는 친구가 노래 하나를 들려줬다. 제목과 아티스트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껏 내가 살아온 주소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 속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는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문득 오늘 생각을 해봤다. 7살 때부터 이달 초까지 살던 집들의 우편 번호를 다시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몇 개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났고, 몇 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검색을 해봐야 했다. 주소를 치고 검색을 하는 동안 ‘이십 대를 관통하며 참 많은 곳에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는 20년 가까이, 짧게는 세 달,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때로는 혼자.
이 집들에 살면서 나는 꿈을 꾸었고, 사랑을 했고, 이별도 했으며, 여행을 했고, 학교를 다녔고, 일을 했고, 때로는 외국에 나와 살며 외로움에 진저리도 쳤다. 그렇다. 나 또한 이 만큼이나 주소지를 갈아치우며 나의 신분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바꾸어가며 살아왔다. 그렇게 이런저런 절절한 마음들을 갖고, 드라마틱한 인생의 여러 단계를 겪는 동안 나는 어느덧 스물여덟이 되었고, 이달 초까지 유효했던 마지막 우편번호와 다음 달부터 새로 갖게 될 우편번호 사이에 머무르고 있다.
요즘은 혼잣말을 참 많이 한다. 영어 연습을 하겠답시고 가끔 영어로도 해보는데, “I’m sick of packing, unpacking, moving, leaving and saying goodbye.” 혹은 “I’m tired of him doing wrong, apologising, arguing and falling for me again.” 이 두 문장을 가장 많이 말하는 것 같다. 계속 짐을 싸고 옮기고 이별하는 생활이, 한 사람과 질리도록 싸우고 화해하고 결국은 허공에 흩어질 이야기를 주고받던 일이 참 지긋지긋하기도 한가보다. 불행하게도 요즘 나의 테마는 ‘Sick and tired’니까.
자유와 외로움은 공존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나는 한국에서 그리고 외국에서 수도 없이 새로운 주소를 얻어가며 살아가겠지.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웹사이트에 등록된 주소지를 바꾸고, 지인들에게 엽서를 쓸 때마다 새로운 우편번호를 적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겠지. 그것이 안정적인 생활 중이든, 언제 또 짐을 싸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불안감 속이든 말이다.
나는 여전히 어떤 삶의 방식이 내게 가장 좋을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이사를 한다는 것, 한 곳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 필연적으로 사람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물리적인 이별이든 정서적인 이별이든 간에 우리는 결국 떠나고 잊힌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불행만은 아닌 것은 떠나고 머물기를 반복하는 동안 분명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남는다는 이유 때문이고, 한 집에 살며 가졌던 마음들과 쌓아온 추억들과 누군가와 마음을 영혼을 엮었던 따뜻함은 이렇게 뭉근히 내 속에 남아 지금의 나를 구성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주소지를 하나 더 늘리는 일이 힘에 부친다 하여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려고 한다.
비록 모든 추억이 따뜻하지만은 않다고 해도 결국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