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도 어째 수상하다.
시절이 하 수상하고 내 마음도 어째 수상하다.
한동안 보지 않았던 뉴스룸을 다시 챙겨 보고 있다. 나는 상스러운 욕설들을 모든 뉴스 꼭지 하나하나에 추임새 넣듯 덧붙인다. 얼마 전에는 사장님께서 이런 시국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어른으로서 면목이 없고 죄책감이 든다며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트라팔가 광장으로 1인 시위를 나가셨다. 어떤 예술인 한 분은 오로지 무려 예술인 검열 사태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에서부터 영국까지 날아와 주영 한국문화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계신다. 나는 고작 1시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피켓을 들고 서있었으면서도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불편했는데, 이 분들은 어찌 이렇게 용감하실까 하고 감탄을 한다.
그 감탄의 핵에는 죄책감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광화문이나 여의도로 종종 집회에도 나가곤 했는데, 막상 이렇게 근거리에서 행동하는 분들이 있는데도 나는 자꾸만 몸을 사리게 된다. 비민주적인 정권을 비판하고, 복지나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절대로 내 몸 다치는 실천은 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을 느낀다. 그리고 이상 속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항상 사회의 부조리에 관해서라면 큰 분노를 느끼면서도, 막상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은 없다는 내 마음 깊은 곳의 오랜 죄책감이 이렇게 수면 위로 둥둥 떠올라버렸다.
이 와중에 나는 2 군데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역시 내 글은 내 친구들만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며칠 째 떨칠 수 없다. 비겁한 데다 글까지 못 쓴다는 생각이 드니 쪼그라든 나의 세포들이 도무지 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세상이 혼돈스럽기 때문에 내 마음 하나조차 온전히 돌볼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아, 기죽지 말고 꾸준히 정진해서 더 실력이 나아지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도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하기에는 내가 사는 세상부터 고쳐 써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를 부담스럽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하니 그럴듯한 문장을 가장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징징거리는 귀여운 글을 쓰지도 못하겠고, 재능 없음에 괴로워하는 예술인 코스프레를 하지도 못하겠고, 곧 떠날 1박 2일 짧은 여행에 들뜨지도 못하겠고, 곧 영국으로 나를 만나러 오는 절친한 친구와 무얼 할지 계획을 세우지도 못하겠다. 예술계 성폭력이니, 박근혜 게이트니, 예술인 검열이니 하는 모든 부조리 때문에 그리고 내 간장종지 만한 그릇 때문에 나는 고작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데에도 죄책감이 든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은 오히려 아름다운 일일 터인데, 나는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다.
내가 속한, 그러나 끊임없이 탈출을 욕망하게 만드는 이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오직 분노와 죄책감뿐인 세상이 아니라, 마음껏 사랑하고 들뜨고 집중하고 고민할 수 있을 만한 터전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는 또 화가 난다. 자기의 마음과 감정의 소소한 변화를 느끼고 관찰하고 잘 보살펴 주는 것은 마땅히 젊은이의 일이 아닌가. 왜 이 작은 마음의 콩닥거림마저 부끄럽게 느껴져야 하는가. 왜 재능 없음에 절망했다가 바닥을 한 번 쳤다가 다시 치열하게 일어설 기운을 얻을 수조차 없는가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