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지나고 보면 축복일까요?
대학시절 한 학기 동안 해외 인턴십으로 유럽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다. 당연히 필름 카메라와 필름을 한 보따리 들고 갔다. 이제 고작 두어롤이나 찍었을까, 셔터가 눌리지를 않는 것이었다. 가난한 데다 귀찮음도 많았던 나는 현지에서 카메라를 수리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까짓 거 눈에 많이 담을 요량으로 쿨하게 포기하였으나,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그 두어 롤이라도 빨리 확인해 보고 싶어 잽싸게 현상을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모든 사진이 포커스가 아웃된 상태가 아닌가. 대학 내내 들고 다니며 손에 익힌 카메라를 잃어버려서 떠나기 전 급히 같은 기종의 카메라를 샀는데, 포커스가 고장 난 렌즈를 달고 런던까지 와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서 신나게 사진을 찍으며 가져온 필름을 다 써버리고 한국에서 수십 통을 현상했다면, 그 당혹감이란 얼마나 어마어마했을까. 당시에는 이 먼 곳까지 와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때 셔터가 눌리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신의 한 수였다고. 작은 비극이 더 큰 당혹스러움을 예방해 주었다고.
지금도 그렇다. 가늠할 수 없이 길게 펼쳐진 기대와 희망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라고, 더 걸어가 봐야 별스럽지 않을 거라고. 개울가 한가운데 멈춰 서서 가운데가 텅 빈 돌다리를 바라본다. 저 너머로 가면 정말이지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텐데 멈추라고 한다. 이쯤 되면 알아채야지 않겠느냐고. 나의 마음은 아쉽고 또 아쉽지만, 어쩌지, 지금도 그때처럼 셔터가 눌리지를 않아. 카메라 안에는 필름이 있고, 가방 안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필름이 한 보따리는 더 있고, 당신과 내가 함께 보며 담아갈 풍경도 앞으로 수만 킬로미터는 펼쳐져 있겠지만,
어쩌지. 또 셔터가 눌리지 않네. 이번에도 지나고 보면 축복일까요?
(그나저나, 누군지는 몰라도 화해는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TRACY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