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일찍 끝나는 분위기였다. 회사 동료들하고 회식을 해도 이젠 9시가 되기 전에 끝난다. 일 차, 이 차, 삼 차까지 끈적하게 마시고 비틀거리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다. 최근에 그런 적이 있는 지 생각해 보면, 바로 떠오르는 기억도 없다. 오늘은 일 차로 끝내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누군가를 잡고 하소연을 하든 잡담을 하든 얘기가 하고 싶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하는 동료 중 네 명이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지만, 이 차를 가자는 말에 두 명은 일찍 들어간다면 집에 갔다. 지금 내 앞에는 한 참 후배가 앉아있다. 나머지 두 명이 모두 일찍 들어간다고 하자 후배는 잠깐 고민하더니 같이 가고 싶다고 웃으며 답을 해 준 친구다. 눈치가 빠르기 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고마운 후배다.
- 회사 생활은 어때?
- 재미있습니다.
익히 들었던 질문이라고 생각했는 지, 준비된 답처럼 답을 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재미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나도 후배 나이 때 그랬을까? 지금 나는 벌써 회사를 20년째 다니고 있고, 최근 회사에서는 재미있던 일이 있었는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맥주를 손에 들고 눈을 들어 천장을 잠시 바라봤다. 재미있는 일이 그렇게 없었을까?
- 나는 재미있는 게 없는 거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료들과 모여서 커피 마시고 수다를 떠는 일이 언제였나 싶어.
- 일만 한 걸까? 그래서 재미있는 게 없었나 보다.
그래서 오늘은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후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는 듯 한 표정이다. 나는 생맥주를 마시고 간장과 마요네즈가 섞인 쏘스에 먹태를 찍어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곰곰히 생각해도 재미있는 일들이 없다. 최근엔 더욱 우울했다. 코로나가 전세계를 덮치고 이동이 금지되고, 사람과 만나는 일이 조심스러워진 상황이었다. 코로나 방역에 성공한 덕에 전국에서 하루 수십명 정도만 전파되고 있어 조심스럽게 술자리를 갖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일 하는 것 말고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쉴 수 있는 공간은 폐쇄되었고,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하는 풍경도 점점 사라졌다.
- 너가 17년 더 회사다니면 내 모습과 비슷할까?
- 그럴 것 같습니다.
후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7년 뒤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내 질문에 공감을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표정이다.
- 너가 볼 때 내 모습은 어때?
- 좋은 것 같습니다. 대기업 부장님이고, 일도 잘 하시고, 후배들도 잘 챙겨 주시는 편이시죠.
후배가 마음에 있어서 한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기분은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좋게 평가하면 내 삶에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상사가 나한테 똑같이 물었다면 나도 비슷하게 대답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질문이 별로였네. 그치? 최상무가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으면 나도 비슷하게 대답했을 거 같아
- 아니요. 정말 닮고 싶은 선배세요.
-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았었는데, 네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 기분이 좋네. 오늘도 최상무한테 한참 깨졌거든.
프로젝트 내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팀장이 나에게 화를 냈다. 도대체 성과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십가지가 입속을 겉 돌았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일 절만 듣기 위해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침묵을 치키고 있었다. 하지만 일 절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날이라도 잡은 것처럼 물고 늘어지면서 깨고 또 깨고를 반복했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 상태였다. 한 시간 전 최상무가 연구소장한테 불려갔었던 것이 지금의 감정 상태를 만든 듯 했다. 아마도 최상무도 한바탕 혼나고 와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않일 시간이 없었던 거 같다. 타이밍이 잘 못 된 것이었다.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었지만,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 차분했던 내 감정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사표를 최상무 얼굴에 던지고 싶었다. 눈은 바닥을 보면서 머리 속에서는 그런 상상을 했다.
- 이과장님한테 들었습니다. 팀장님이 엄청 깨셨다고...
- 미래의 네 모습이 내가 된다고 해도 괜찮겠어?
- 네?
이번에는 내가 소리내서 웃었다. 후배도 따라 웃었다. 웃으면 농담으로 뒷담화를 삼는 일이고, 웃지 못한다면 심각하게 슬픈 일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우리는 웃었다. 웃다보니 쓴 웃음이 되었다. 후배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17년 뒤 팀장한테 깨지는 상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나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 부장님은 좋은 차를 타고 다니시고, 좋은 동네에 비싼 아파트도 가지고 있으시고, 결혼하셔서 행복한 가정도 있으시고, 가끔 저희한테 얘기하는 예쁜 딸도 있으시잖아요. 저도 17년 뒤에 그런 모습이고 싶습니다.
- 그러게. 그렇게 들으니 참 많은 걸 가졌네. 나도 사원일 때, 부장님들 보면서 그런 생각했었는데...
- 회사에 들어와서 20년이 지난 지금 그 때 생각한 대로 성공했구만...
20년 전 내가 가졌던 생각과 비슷했다. 막 회사원이 되었을 때,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 노트에 적었던 것이 생각난다. 8평 정도의 원룸에 혼자 앉아 궁궐같은 집에서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과 함께 사는 미래에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적어가던 나이는 마흔살이 마지막이었다. 마흔살이 되기까지 회사에서 대리로 진급하고 과장으로 진급하는 것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도 있었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는 것도 있었다. 멋진 자동차를 사는 것도 있었고, 가족들이 오손도손 살 수 있는 집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웃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있었다. 이런 내용이 쓰인 종이는 어딘가 사라져 버렸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상상했었다. 내가 20년 전에 생각했던 모습과 후배가 지금 생각하는 모습은 비슷했고, 내가 과거에 생각했던 모습과 지금 모습이 비슷했다. 그렇게 보니 내 계획은 성공했다. 난 성공했다. 20년 전 성공의 기준으로 삼은 것들은 모두 달성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족했다. 차를 가져도 집을 가져도 아내를 가져도 아이를 가져도 성공을 채울 수 없었다. 더 큰 집이 갖고 싶었고 더 비싼 집이 갖고 싶었다. 아내에게 더 좋은 남편이 되고 싶고 아이에게 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매년 해외여행 다녀야 할 것 같고, 더 많은 물질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더 좋은 차를 사고 싶었고, 내 동료가 좋은 차를 살 때마다 나도 다음엔 더 비싼 차를 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20년 전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있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은 그 때와 비슷한 것 같다. 얼마나 가져야만 채울 수 있을까? 성공할 수 있을까? 남들이 가진 것 중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계속 가지면 가능할까? 계속?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일까? 가지려고 한 발 다가서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다시 욕심을 내서 더 좋은 차를 사려고 하고, 더 비싼 집을 사려하고, 더 많은 연봉을 받으려고 지나 온 시간이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난 까마득한 후배 앞에서 맥주 잔을 손에 쥐고 홀짝 거리며, 먹태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고 있었다.
- 취업했을 때 좋았지?
- 네, 합격소식을 들었을 때가 엊그제 같아요. 그 때 굉장히 기뻤었죠. 부모님께서도 굉장히 좋아하셨구요.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취직하셨다고 친구들 앞에서 어깨에 힘도 주시고 그랬어요.
- 나도 그랬었지. 지금도 우리 엄마, 아빠는 어깨에 힘 주고 다니셔.
후배와 나는 동시에 웃었다.
- 그리고 대리로 진급했을 때, 내 스스로 무척 기뻤었어. 첫 진급이었고 자신감도 뿜뿜이었거든. 그리고 결혼은 심장이 터질 듯 긴장되고 어려운 일이었지. 물론 결혼생활은 아직도 진행중이야.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기뻐서 눈물이 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지. 막 태어난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어찌나 투명하던지,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내모습을 내가 볼 수 있었어. 그 모습에 내가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니까!
- 처음 내 집을 샀을 때도 잊을 수 없지. 내 집이라고 하니 뭔가 다른 마음이 들더라구. 음... 그런 느낌이었어. 내가 안정된 기반을 만들었다는 느낌. 비유해 보자면, 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농부가 작지만 자기땅을 처음 가졌을 때 느꼈을 성취감, 그런 거 아니었을까? 내 집이 있다는 것이 아주 큰 감정의 변화를 일으켰어. 처자식에게 당당한 느낌이랄까? ㅋㅋ
나는 하던 말을 멈췄다. 나 혼자 떠들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입을 좀 다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멈추기 위해 맥주를 홀짝거리며 먹태를 먹었다. 여기서 멈추지 못하면 꼰대가 될 것이고, 멈추면 꼰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 저도 시간이 지나면 부장님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집도 사고 차도 살 것 같아요.
- 부장님, 지금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세요?
먹태가 목에 걸린 것 같았다. 내 심장에 누군가가 커다란 돌덩이를 올려놓은 기분이었으며, 깊은 한 숨이 나왔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더 이상 아빠와 함께 할 시간이 없었고, 아내는 아이들 공부 매니저로 변신하여 내 짝꿍이라는 본연의 본질을 잊은 듯 하다. 내 집에는 거실 쇼파와 티비만 나를 반길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갖고 싶었던 모든 것들에서 나는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의 끝일까? 가끔씩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지곤 했던 것이 이 질문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