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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지아빠 May 09. 2020

나는 네가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네가 돌아오기만 기다려

아빠로써 삶의 시작

 내가 어릴 적 우리 집에 물을 끓이면 휘파람 소리가 나는 주전자가 있었다. 수증기가 주전자 주둥이 물체를 통과하며 '휘이이'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스 불을 끄곤 했었다. 그 주전자는 한 가지 더 멋진 장점이 있었는데, 마치 큰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증기기관차처럼 수증기를 멋있게 뿜어냈다. 나중에 더 멋진 주전자의 모습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수증기로 바뀌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알고 나서였다. 물을 끓여 100도가 되면 수증기로 변하는데, 사실 물은 100도까지 오른 후 충분한 에너지를 축적해야 수증기로 변할 수 있다. 충분한 에너지가 쌓인 그 순간 물은 수증기를 끝없이 만들어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주전자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볼 때, 물에 쌓여 있는 넘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물이 수증기가 되기까지 묵묵히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 삶과 닮았고, 그 에너지가 충분히 쌓여야만 수증기가 될 수 있음이 삶의 교훈이 되곤 한다. 수증기를 뿜듯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것, 그 시작에 대해 얘기를 해보려 한다.

 

 아기가 막 태어나 너무나 투명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그 자체 만으로 가슴이 벅차 울컥했다. 기뻐서 눈물이 나는 경험은 너무나 생소했고, 웃고 있는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가 된 것이 무척 낯설었지만 강한 의무감이 들었다. 그런 느낌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변화를 예고하는 복선 같은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작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난 아빠라는 말조차 어색했다. 주전자에 물을 담아 막 불을 켠 상태 같았다. 처음 아기를 키우는 부모에겐 어려움이 많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일이 전부지만 쉴새 없이 반복되는 일들이 버겁게 느껴지기 일수였다. 하지만 내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기도 했고, 늦은 시간까지 티비나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나를 아내가 잡았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네가 돌아오기만 기다려." 


 아내의 눈물과 가슴을 아프게 하는 한 마디를 뒤로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나는 아직 물이 끓지도 않았는데, 아내는 아이를 뱃속에 품을 때부터 끓기 시작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수증기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고통이 산후우울증으로 찾아왔고, 엄마가 되는 고통을 스스로 인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이 후 나는 양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친구와 어울려 술 마시던 것을 멈췄고, 회식 때도 일찍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를 재우며 함께 잠들고 깨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기가 길게 잠들기 시작하면서 아내와 나는 밤 시간의 여유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아기를 재우고 나란히 앉아서 티비를 보는 것이 꿀처럼 달콤했다. 아이는 이런 소소한 것들도 행복으로 느낄 수 있게 나와 아내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물이 끓어 수증기로 변하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어느덧 아이는 자라 걷고 뛰었지만 아내는 항상 피곤해 했다. 아내가 ‘갑상선기능저하증’이라는 병을 인식하지도 못 한 채 우리는 일 년 넘게 힘든 생활을 지속했고 이 때 우리는 정말 힘들었었다. 병을 알고 처방받고 약을 먹으면서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아내의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깔끔히 사라졌고, 우리는 비로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이 시기에 나는 상담을 받으러 다녔었다. 누군가한테 내 답답한 속마음을 하염없이 쏟아내야만 한 주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나와 아내는 아빠, 엄마라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물이었던 우리는 이제 드디어 수증기가 된 것이었다. 회사가 일찍 끝나면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던 나는 이제 집으로 일찍 돌아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 늦게까지 티비를 보고, 영화를 보던 나는 밤 시간을 포기하고 불금에도 아이와 함께 잠을 잤다.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하루 종일 놀았고, 나의 놀이보다는 아이와 함께 하는 놀이에 더 관심을 가졌다. 수증기를 보면 멋진 증기기관차를 연상했듯이 아빠로써 삶의 시작에는 놀라운 변화들도 따라왔다. 평생 올빼미족으로 살 거라 생각했던 나는 어느새 아침형 인간이 되어 있었다. 아기를 재우다 같이 잠들었고, 자연스럽게 새벽에 일어났다. 밤 시간이 없어져 허탈한 마음이 커져갈 때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충분히 잠을 자면서 점심시간에는 책을 읽었고 이렇게 매년 50권 넘게 읽고 있다.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짜투리 시간이 생기면 틈틈이 취미생활도 즐기게 되었다.  

 

 내가 시작한 모든 일 중에 아빠로써 삶이 가장 어려웠고, 가장 놀라운 변화를 만들었다. 우울증에 빠질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더 행복했다. 아빠라는 말이 나에게 익술해질 쯤, 나는 나의 아빠를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조금은 당신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비록 아직 한 참은 멀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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