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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지아빠 Apr 19. 2020

투명한 검정, 커피

나에게 주는 하루의 선물, 커피





커피가 들어있는 봉투를 여는 순간 커피가 가지고 있는 향이 밖으로 퍼져나왔다. 잠시 동작을 멈춘다. 볶아진 커피 콩이 내는 향은 커피가 가진 고유의 냄새에 구수한 냄새가 더해진다. 향기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달콤한 향이 느껴진다. 아주 강하게 달달함이 느껴질 때는 치자꽃의 달달함이 생각난다. 냄새만으로 잠시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커피 스푼으로 커피 콩을 담아 드리퍼에 옮겨 담는다. 오늘은 조금 더 진한 맛을 내기 위해 평소보다 한 스푼을 더 넣는다. 


사무실에는 공용으로 사용하는 커피 전동그라인더가 휴게실에 있어, 거기까지 이동할 때는 드리퍼에 커피 콩을 담아 간다. 그라인더 앞에서 누군가 달콤한 향이 사라진 눅눅한 커피를 잘게 갈아내지 않았을까 싶어 찜찜한 마음이 생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용 그라인더 앞에 서면 느끼는 감정이다. 스쳐가는 생각을 떨구고 그라인더에 커피 콩을 넣어 커피를 적당한 크기로 갈아낸다. 이 때 나는 향은 커피 봉지를 열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콩이 갈라지면서 내는 향은 굉장히 빠르게 공간을 채운다. 봉지를 열 때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잔잔한 향에 취해간다면, 그라인더에서 나오는 향은 한 순간에 공간을 모두 채우고 온전히 커피 향에 빠져들게 한다. 커피를 모두 갈아 내면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의 삼분의 일은 끝난다. 봉투를 여는 순간부터 나오는 향으로 시작해서, 공간을 가득 메운 강한 커피 냄새로 후각은 절정에 도달해 버린다.


드리퍼에 종이 필터를 넣고, 그 위에 분쇄된 커피를 담는다. 드리퍼를 좌우로 흔들어서 나름 평평하게 맞추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뜨거운 물방울을 떨어트린다. 온수기에서 나오는 온수의 온도는 커피포트로 끓여내는 온도보다 낮아서 커피에서 나오는 맛이 비교적 새콤한 맛에 가깝게 만들어진다. 이건 어쩌면 순전히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내는 맛일지도 모른다. 참이슬과 처음처럼을 단 한 번 맛보고 구분하는 것처럼 말도 안되는 맛의 구분이지 않을까? 커피와 소주가 한 번에 떠오르니 기분이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이다.

커피 위에 떨어지는 물줄기는 기교를 즐길 수 있게 한다. 물줄기의 굵기를 조절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주 가느다란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주둥이가 작은 주전자를 통해 커피를 내려 먹던게 생각난다. 처음에는 커피보다는 물줄기에 더 집중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줄기에 부풀어 오르는 커피를 보기 시작했고, 커피가 심장처럼 부풀어 오르고 내리는 리듬을 맞추는 것이 좋아졌다.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커피는 기름이 물에 떨어졌을 때처럼 동그랑게 커피 위를 유유히 움직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커피 속에 녹아들어간다.


커피를 잔에 담아 향을 한 번 음미하고는 까맣고 투명한 액체를 본다. 어둠은 빛을 빨아 드리지만, 어둠처럼 검은 커피는 그 빛을 반사한다. 이렇게 투명한 검정색이 어색하지 않다. 딸아이가 막 태어나 처음 만난 그 순간 나는 아이의 눈에서 투명하고 빛나는 검정색을 처음 봤었다. 커피를 마시기 전 아이의 빛나는 눈 속에 비쳐지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면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을 즐긴다. 여기까지 온전히 내 시간으로 가지면 하루가 느긋하고 여유있게 보낼 수 있다. 잠을 쫒기 위해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주는 하루의 작은 선물로써 커피이다. 


한 철학자가 현대를 피로사회라고 표현했다. 너무나 치열한 경쟁속에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영어를 공부하고, 피투니스에서 건강과 몸을 관리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상황으로 스스로는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를 위로하듯 챙겨주는 커피 한 잔은 잠시나마 나를 온전한 나로 만들어 주는 시간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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