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 이모 딸 결혼 후 모인 친척들과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다시 돌아서서 시골 이모를 바라봤다. 엄마의 둘째 언니. 엄마보다도 한 참 나이가 많은 시골이모.
시골 이모의 모습이 오늘은 무척 낯설다. 강인하고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살피던 이모의 모습이 없다. 무언가를 놓고 있는 듯한 힘겨운 모습이다. 수척해 보이기도 하고 왠지 어색하기만 하다. 뇌질환이 있다는 말을 하시는 목소리에는 힘도 없다. 작은 체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시던 이모였는데. 기억을 흩트리고 다시 이모를 본다. 그리고 다시 이모한테 가서 한 번 안아주고 온다. 어쩌면 이 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오늘 저녁 식사 자리도 난 7년만에 참석했다.
엄마 형재들은 유독 형제애가 좋아서 자주 모였고 얘기도 많이 했는데 이젠 그런 지 아닌 지도 잘 모른다. 아내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나서 뜸한 발걸음이었다. 그렇게 7년만에 얼굴을 비췄는데 마치 어제 만났던 것 같다. 따뜻하고 또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에는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많다 엄마 세대에서 내 세대로 넘어오면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내가 대학생 때 초등학생이던 꼬마들이 이제는 다 성인이 되어 있다. 누가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도 헤깔린다. 변하지 않던 것과 변하는 것들. 난 아주 잠시 그곳에 다시 돌아왔다.
시골 이모는 미용실 이모 큰 딸 결혼식을 보려고 익산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 자식이 그리 많은데 좀 모셔오지란 생각이 들면서도 아마 나도 그러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헛 웃음이 나온다. 끔찍히 아끼는 아들이 셋이나 있는 이모인데 아들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다른 이들도 우리 엄마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껌딱지처럼 엄마 옆에 붙어 있던 내가 없어진 이후부터 아들이 그래도 되나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내가 시골이모를 보며 생각했던 것이 도로 나한테 돌아 온다. 수척해진 이모를 살며시 안는데 따뜻하다. 아직은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이모가 정겹다.
그 따뜻함은 삼 년 전으로 나를 돌아가게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할머니를 관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수의가 입혀져 있었고 우리가 마지막 인사를 하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나는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울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져보라는 말을 듣고 할머니 얼굴에 손을 얻는다. 나의 할머니. 차갑다. 죽음은 차갑다. 그 차가움은 손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살갖의 차가움이 더 슬펐다. 눈물을 넘어 입에서 울음 소리마저 나온다. 마지막이란 것이 슬프고 차가움도 슬프다. 눈과 입과 코가 모두 울 던 그 시간이 다시 떠오른 건 어쩌면 또 다른 마지막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내가 먼저 미용실 이모 집을 나오자 엄마와 아빠가 배웅한다. 나는 넌지시 이모 상태를 묻고 엄마는 한숨으로 답을 하신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 숨. 하지만 이내 엄마는 아들을 챙긴다. 밥 잘 챙겨 먹어라, 스트레스 받지 말아라, 힘들어도 잘 참아라,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라, 그리고 아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는 내 딸을 본다. 내 딸을 보면서 나를 보시는 걸까? 그렇게 엄마는 떠나가는 아들을 본다. 아들은 엄마와 아빠를 본다. 우리는 이제 말 대신에 서로를 그냥 본다. 나는 차를 조금씩 움직인다. 그리고 멀어진다.
차를 타고 나의 마음이 어둡다. 아쉽다. 허전하다. 그러고 있는 데 아내는 심기가 불편하다. 그 식사 자리에 간 것이 불편하다. 불편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정겹고 좋은 자리지만 아내한테는 그런 자리가 아니니깐 더욱 그럴 것이다. 이제는 그 것을 인정할 때도 되었는데 난 섭섭하다. 아내가 무척 섭섭하다. 그렇게 앉아 있던 시간은 고작 2시간이었는데, 나는 속으로 아내에게 서운함을 쏟아낸다. 아내는 나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불편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지 쏟아낸다. 그렇게 우리는 차 안에서 침묵을 지킨다. 그 고요함은 바로 그런 의미다. 바로 그런 의미. 난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온 것이다. 아이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시간은 9시다. 아내는 아이가 잠들자 더 불만이 커진다. 자는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아내. 그래도 난 속으로 서운함을 쏟아낸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다.
"당신이 씻기고 재워. 왜 늦게까지 거기 있으려고 하는 거야!"
드디어 아내는 터트린다. 아내는 빨리 터진다. 나보다 빨리. 그리고 요점을 정확히 집는다. 나는 잠이 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있다. 그리고 내가 서운해 하던 바로 그것을 짜증낸다. 나도 터진다. 끌어 오른다.
얼마나 있었다고 그래.
내 얘기도 정당하다. 두 시간. 아이랑 같이 밥을 먹으면 우린 기본이 한 시간이다. 아이 밥 먹고 나는 잠시 얘기만 하다가 일어났다. 아내가 싫어할 것을 생각했고, 2시간 중에 중간 중간 눈치를 주던 아내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했다. 더 있고 싶었고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니가 알아서 재워."
알았어. 내가 재워. 지아야 안 씻어도 돼. 그냥 자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내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나는 그 손을 뗀다. 그리고 아이를 침실로 데려가려 하고 아내는 막는다. 그리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는 눈을 뜬다.
"나 씻을레."
우는 목소리다. 난 손에 힘을 뺀다. 그리고 아이를 엄마한테 보낸다. 아이는 엄마를 안고서 씻을거라고 다시 말하고는 눈을 감는다. 아이는 엄마가 좋다. 그리고 약자인 엄마를 아빠한테서 지켜주고 싶다. 그걸 알고 있다. 꼬마가 엄마를 지켜주고 싶어하는 마음. 그게 느껴진다. 그래서 난 싸우려 하다가고 아이가 말리면 그냥 말림을 당한다. 그 작은 꼬마의 그 마음. 자기가 아빠한테서 엄마를 지킬 수 있다는 그 마음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엄마 아빠가 다툴 때, 나도 아빠한테서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의 아빠가 나의 마음을 지켜준 것처럼.
나는 엄마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는 꼬마를 본다. 나에게는 그 꼬마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누가 준 것도 아닌데 그냥 그 꼬마를 사랑한다. 그래서 엄마한테 안겨 욕실로 들어가는 꼬마를 본다. 난 꼬마한테 미안하다. 내가 아내와 싸운 이유가 무엇이건 나는 꼬마한테 그냥 미안하다. 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미루어 짐작해 볼 수도 없다. 그냥 미안했을까?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시골 이모 얼굴이 벌써 흐릿하다. 시골 이모의 아들들도 나처럼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 붇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도 전혀 식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이모는 그런 아들들을 보면서 어쩌면 미안한 마음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아픈데도 자식한테 미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되는 순간 갖게 되는 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기는 바보 같은 사랑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