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즐겁지만은 않다.
오랜만에 열흘의 휴가를 냈다. 연말에 크리스마스와 신정이 금요일에 끼여서 4일 연차를 내면 총 열 흘이나 쉴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휴가를 권장하기에 못 이기는 척 휴가를 썼다. 그리고는 열 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생각에 잠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가족 여행이다. 그래서 열심히 인터넷을 서핑하기 시작한다. 숙소만 정해지면 나머지는 지방정부 홈페이지에서 명소를 찾으면 될 것이다. 아니면 요즘 인기많은 스파에서 겨울 물놀이를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찾다보니 싼 가격의 숙소를 찾았다. 스키장을 끼고 있지 않은 곳들은 겨울이 비수기이니, 그런 곳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월에 리조트를 예약하고 나니 무언가 큰 짐을 덜은 느낌이다. 휴가를 쓰는 것이 부담인가? 왜 이런 안도감이 드는 지... ㅉㅉ
휴가 첫 날 평소와 같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참 습관이 무섭다. 무의식의 시계는 날 아침 일찍 깨웠고, 난 운동복을 입고 아파트 휘트니스로 갔다. 러닝 머신 위에 올라 한 참을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한다. 특별히 빨리 뛰고 싶은 마음도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뛰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니 몸은 빨리 지치고 계속 걷고 있다. 땀이 날듯 말듯한 상태에서 러닝머신을 내려와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아침 일찍 아파트 구석진 자리로 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운다. 아파트 사이로 다른 아파트만 보인다. 그 답답한 아파트들처럼 나도 무엇을 하며 휴가를 보낼 지 답답하다. 예전에도 휴가가 이렇게 별거 없었나 싶다. 5살 꼬마 아이가 걸린다는 핑계를 대며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레 포기를 하는 것일까? 며칠 전에 휴가를 내고 아내한테 서로 하루 정도씩은 혼자만의 휴가를 즐기자고 제안을 했더니 알았다고만 했다. 그럼, 휴가는 하루이다. 나의 휴가 하루. 아내는 다음 주 월요일날 자기가 아이만 데리고 놀이공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 날 당신 하고 싶은 거 아주 맘껏 즐기면서 보내..."
아내의 이 말 한 마디가 참 거시기하다. 이미 난 내가 즐겁게 놀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까먹은 듯 하다.
"뭐 하면서 보낼거야?"
이 말도 거시기 하다. 날이 춥지 않으면 종종 싸이클 타고 한강까지 갔다오면 하루가 금새 지나갔는데, 지금은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냥 책이나 읽고 티비나 볼까? 그러기에 휴가가 아깝지 않을까? 그래도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다. 엄마를 보러 가기도 그렇고,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해도 연말이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참.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내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말을 했으면 대답 좀 해라."
대답 못 하는 내가 더 답답하다. 소리지르지 마라.
아침에 운동하고 샤워를 하고 나니 상쾌한 기분이 든다. 하루를 생생하게 보내는 한 방법이다. 최근 반 년동안 아침 일찍 운동을 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러니 자연히 일찍 자게 되고, 숙면을 하게 되고, 아침 운동하면 상쾌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5살 꼬마와 놀아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늦잠자는 꼬마가 내가 쉬는 날에는 기막히게 일찍 일어나서 나한테 온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티비 앞에 간다. 그리고 기다린다. 나는 티비를 켜준다. EBS를 틀어준다. 10시까지는 만화가 나온다. 나도 열 시까지는 책을 읽을 수 있다. 아이는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겨드랑이 사이를 몸으로 파고든다. 꼬마의 체온은 참 따뜻하고 그 냄새도 달콤하다. 둘이 몸을 붙이고 앉아서 나는 책을 꼬마는 티비를 본다. 그러다 아내가 거실로 나오면 우리를 아니 나를 한심하게 본다.
"왜 애랑 놀아주지 않고 티비만 틀어줘?"
말을 하고나서 아내는 아침을 준비한다. 나는 그냥 책을 읽는다. 오늘부터 내가 할 일은 아이랑 노는 거고, 틈틈이 나는 책을 보는 거다. 그렇게 아침을 먹었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다가온다. 아내의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하루 종일 집 안에 밖혀서 세 끼를 꼬박 챙겨먹는 내가 미울 것이다. 그리고 저녁을 먹었다. 아내 말투가 조금은 공격적으로 변해있다. 나는 휴가이고 자기는 잔업의 특근처럼 일량이 늘어났으니 내가 미울 것이다. 휴가 첫 날부터 분위기가 안 좋다. 이번 휴가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둘 째날은 주말이라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다음주에 내 생일이 있어 미리가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왔다. 그리고는 또 늦으막히 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재우고는 티비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서 잠을 자러 방에 들어갔다. 자연히 다음날부터는 늦게 일어났다. 아이는 8시만 되면 기가 막히게 내 옆으로 와서 몸을 부빈다. 나는 눈을 뜨고 아이 손을 잡고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티비를 틀어준다. 그리고 졸린 눈을 비비며 아이 만화를 같이 본다. 아이가 보는 만화가 그냥저냥 볼 만하다. 참으로 신기하다. 며칠 지나면 마흔인데, 저런 만화가 볼만하다니... 그리고 아내가 나온다. 아내는 아침을 준비한다. 그리고 점심을 준비한다. 이 거 불안하다. 저녁까지 먹으면 하녀 부린다고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쇼핑 몰 근처에 들러 크리스마스 트리를 잠시 구경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싶어하는 아내. 그걸 왜 보고 싶냐고 말하고 싶은 나지만, 차마 그 동안 밥만 축내고 있었던 나로써는 그냥 같이 옆에서 걷다가 사진을 찍어주다가 한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아이를 재우고 나는 티비를 보면서 또 하루를 보낸다. 이거 마치 학생 때, 방학 때면 뒹굴던 그거와 비슷하다. 나이와 상관없는 건가? 그리고 내일이면 월요일이다.
날씨가 추워져서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아내와 아이는 중무장을 하고 놀이공원으로 떠났다. 자그마치 12시에... 그리고는...
"오늘 하루 맘껏 즐겁게 지내셔..."
이렇게 말한다. 아내의 하루는 어떤 기준인지 의심스럽다.
그래, 잘 다녀와.
"점심 잘 챙겨먹고..."
응, 알았어, 잘 다녀와.
집에 혼자 남겨진 나. 흔한 일이 아니다.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어마어마한 일이다. 일단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부동산 경매에 관한 책이다. 요즘 부동산 경매와 주식에 한 참 열을 올리고 있다. 이거라도 안 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흔이 바로 코 앞에 오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계속 읽다가 라면 끓여 먹다가 티비보다가 시계를 보니 여섯 시다. 나의 하루를 여섯 시간이었고, 벌써 다 지나가 버렸다. 아내와 아이가 집에 왔다. 열흘의 휴가 중 나만의 휴가 하루는 끝났다. 이제 그냥 아이랑 놀기만 하면 된다. 남은 일주일 동안 내내.
다음날 우리는 영월로 여행을 떠났다. 2박을 예약을 했고, 하루는 하루종일 물놀이를 할 예정이다. 그래서 첫날은 지역 축제에 가기로 했다. 얼음낚시, 얼음썰매, 눈썰매를 탈 수 있는 축제이다. 드디어 영월에 도착했다. 화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얼음낚시와 얼음썰매는 탈 수 없다. 얼음이 얼지 않았다. 얼지 않은 얼음썰매터와 얼음낚시터가 을시년스럽다. 그래서 눈썰매 티켓을 끈어 왔는데, 아이는 무섭다고 안 탄단다. 그냥 평평한 눈길에서 썰매를 끌어달라는 아이.
나는 루돌프가 아닌데...
아내는 아이를 어떻게든 꼬득여 보지만 실패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열심히 탄다. 본전을 뽑아야 한다면서 계속 탄다. 나는 계속 썰매를 끌고 있다. 그렇게 한 참을 하다보니 아이가 혼자 논다. 그래서 나는 아내랑 눈썰매를 탄다. 하지만 이것도 별로 재미없다. 뭘 해야 재미있는 지 잘 모르겠지만 나의 놀이는 아닌 듯 싶다. 그렇게 놀다가 숙소로 가는 길에 슈퍼에 들러 장을 본다.
내일 저녁은 내가 삼겹살을 구워줄께...
"정말? 나야 좋지..."
아내한테 밥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숙소에서 밥을 먹어야 술도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얼마 먹지 않는 술이지만 눈치 안 보며 먹고 싶은 마음이랄까. 장을 보고는 숙소에 도착했다. 이 콘도는 몇 번 와 본 곳이다. 강원도에 스키장 없는 지역이 거의 없어서, 이 곳은 겨울마다 비수기고 싸게 숙소가 나오고, 물놀이장에 미끄럼틀이 없어서인지 장난꾸러기들이 많지 않아서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숙소에 들어와서 우리는 바로 늘어져 버린다. 티비를 보다가 시간이 되서 아이를 재운다. 아이를 재우는 일은 참 중요하다. 아이를 재우기 전과 후는 선술집과 나이트클럽의 차이랄까? 아이가 잠을 자야 맘 놓고 보고 싶은 티비도 보고,,,마누라랑... 풉... 난 쏘세지를 구워서 술 한 잔 한다.
다음날 부시시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근처를 산책한다. 동강이 끼고 흐르는 곳인데, 별로 볼 거는 없다. 강 앞에 가서 돌 몇 개 던지고 다시 숙소로 온다. 그리고는 짐을 챙겨서 물놀이하러 간다. 몰놀이는 내가 좋아한다. 약 이 년간 꾸준히 수영을 다녔기에 물놀이를 즐긴다. 하지만 꼬마랑 같이 물놀이를 해야 한다. 작년까지는 무릎 높이의 풀에서만 놀았었는데, 올 해는 아이가 달라졌다. 깊은 풀에서도 아이가 잘 논다. 구명조끼에 적응을 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도 문제없다. 아이가 마치 물개처럼 계속 물 속에서 잘 노니 나도 좋다. 아내랑 아이랑 같이 공놀이도 하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기도 괜찮다. 점심 먹고 또 물놀이를 한다. 계획대로 하루종일 물놀이를 했다. 5시 끝나는 시간까지 주구장창 물놀이를 하고 나왔다. 더 놀고 싶다는 아이를 겨우 달래서 나왔다. 아내와 아이가 씻는 동안 나는 숙소로 가서 고기를 초벌 구이를 하고, 상을 차리고 준비했다. 아내와 아이가 오면 바로 고기 먹고 쉴 수 있게 준비를 했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아이한테 고스톱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화투의 꽃들을 하나씩 알려준다. 매화, 벚꽃, 흑사리, 홍사리, 난초, 장미, 국화, 단풍, 비, 똥...
"또~옹! 하하하 또~옹..."
아이는 마냥 똥 하면서 웃는다. 그리고는 카드 한 장에 꽂힌다. 단풍 위에 있는 사슴이다. 사슴이 무척 마음에 드나보다. 화투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게임을 배운다. 아이가 사뭇 진지하다. 이렇게 뭔가를 긴 시간동안 즐겁게 배울 꼬마가 아닌데, 대충 짝 맞추기와 게임의 룰을 이해했다. 전수가 완료되자 꼬마와 나는 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한 판하면 십분이 걸리는 길고 긴 화투. 고사리 손에 화투가 들리지 않으니, 앞에 펴 놓고 그림 맞추기를 한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꼬마. 꼬마가 먹을게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먹이감을 내가 내주게 된다.
심리전에 강한 영리한 꼬마다.
자기 전까지 내내 화투를 쳤고, 화투 치는 내내 아이는 사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게임에는 룰이 있고 그 룰을 지켜야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 잘 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아이가 룰을 꽤 잘 이해하고 있다. 사슴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것 빼고... 아이 장난감으로 노는 것보다는 화투로 노니깐 조금 괜찮긴 한데, 그래도 재미는 그닥 그렇다. 나도 재미있게 아이랑 놀기 위해서는 아이한테 좀 더 스파르타로 고스톱을 가르쳐야 겠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잠시 생각에 빠진다. 아내와 나는 색깔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 언제 히히덕 거리며 놀았는 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집에서 수다떨며 웃는 거 말고 그냥 재미있게 뛰고 놀고 즐기고 하던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술래잡기하고, 담방구하고, 말뚝밖기하고, 고무줄하고, 오징어하고, 농구하고, 축구하고, 머 그런거 할 때는 그냥 마구 재미있었던 거 같았는데...
열 흘의 휴가. 그 끝에 도달한 지금. 놀지 못하는 나를 본다. 왠지 내 삶에 에너지가 쭉 빠져나간 기분에 힘이 빠진다. 어른이 되면 좋을 줄 알았던 바로 그 시절만 좋은 것일까?
좀 놀 줄 아는 아저씨가 되고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