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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창세기 해례본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2

by 무이무이

문자의 껍질 속에 숨겨진 우주의 씨앗.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고대의 언어'를 단순한 신화적 표현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돌에 새기고, 양피지에 정성껏 기록한 그 한 자, 한 글자가 단순한 이야기였을까요?

당시 ‘텍스트’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습니다.

지금처럼 키보드로 손쉽게 문장을 남길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돌과 금속, 양피지와 사본들… 모든 것은 한 자 한 자의 비용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요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대의 문자들은 결코 낭비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의미를, 한 글자 안에, 한 문장 안에 집어넣으려 애썼습니다. 기호학적이고 함축적인 설계, 그것이 고대 문명의 문자의 본질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


세종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28자의 기호로 담아내려 했고, 이를 “백성을 위한 글”이라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자의 배후에는 철저한 음운학, 기하학, 천문우주학적 구조가 숨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문자체계는 정치적 외교적 이유로 유학자들의 반발과 국체의 동요를 피하기 위해, 오히려 그 첨단성을 감추고 "쉬운 글"로 포장되었습니다. 소리의 위치와 특징에대한 과학적 해석을 글자안에 숨기고 마치 표면적으로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단순히 상형한것을 강조 하여 한자보다 더 과학적이고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피하게 한것이죠. 마치 한자와 마찬가지로 상형문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처럼 인식하게 만든것이죠.


하지만 세종대왕은 음향학자였습니다. ㅣㆍㅡ 천지인 등의 기호만을 이용하여 고주파 소리 저주파 소리 공명과 진동의 형태등을 어떠한 언어라도 과학적으로 표기하는 방식을 개발한것입니다.


또한, 혹시라도 한글이 통용되지 않아서 잊혀졌더라도 그"소리"를 "복원"할 수 있는 장치로써 발음기관을 본떴다는 식의 내용을 넣은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주의에 가려져서 한글이 폐기되지않고 세계인들에게 전달되게 하고자했던 세종대왕의 국제감각은 잘 알지못합니다.


암호화, 기호화된 언어.


이처럼 고대의 기록 역시, 우리에게 단순한 설화로 읽히지만 사실은 ‘암호화된 언어’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창세기 1장’도 그러합니다.

그저 종교적 경전이 아닌, 당시 인류가 가진 최선의 과학과 철학, 우주관과 생명관을 압축한 기호체계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창세기를 읽되, ‘해례본’을 쓰듯 읽어야 합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어떤 시대적 정황에서 쓰였으며, 얼마나 정교하게 의도되었는지를 따져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창세기의 메시지가 만약 직설적으로 쓰였다면, 그 시대의 정치적 현실과 권력의 눈에 띄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상징과 기호로 감싸졌기에, 그 진실은 오랜 시간을 뚫고 우리 앞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리하여 지금부터 우리는 창세기라는 ‘고대 언어의 구조체’를 과학과 철학의 도구로 해독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치 세종이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려 한 것처럼, 창세기의 언어 속에서도 하늘과 사람을 잇는 암호가 감춰져 있을지 탐험합니다



창세기 해례본 ㅡ첫번째ㅡ


태초에(בראשית),


그 처음은 정말 ‘처음’이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창세기의 첫 단어, ‘태초에’, 히브리어로 베레쉬트(בראשית)에 주목하려 합니다.

너무도 잘 알려진 이 단어는, 사실상 우주에 관한 가장 깊은 철학과 가장 고도화된 물리학을 동시에 품은 암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태초’라는 표현을 ‘처음, 그 단 하나의 시작’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즉, "그 처음(in the beginning)"이 아니라, “어느 하나의 시작(in a beginning)”이라는 열린 가능성으로 쓰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닙니다.
히브리어는 정관사 ‘하(ה־, the)’가 있는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왕’은 멜렉(מלך)이지만, ‘그 왕’은 하멜렉(המלך)이라고 명확히 구분합니다.


그런데 왜 우주의 시작을 말하는 가장 결정적인 첫 단어에 정관사를 쓰지 않았을까요?
이 의문의 해답은 고대 우주관에 있습니다 .
고대인들은 우주를 ‘순환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 인도, 마야, 이집트 등 수많은 문명에서 우주는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순환구조로 그려졌습니다.
시간은 선형(linear)이 아니라, 소용돌이치는 나선(spiral)이나 무한히 이어지는 고리(cycle)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의 시작"이란, 그 순환 중 우리가 속한 주기의 한 지점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즉, 우주는 처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태초에’라는 말은 그 수많은 시작들 중 하나, 지금 우리가 관측하고 있는 이 우주의 시작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양자역학의 시선으로도 통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어떤 사건의 결과는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상태는 가능성의 중첩(superposition) 속에 있으며, 관측(혹은 선택)이 일어날 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결과로 ‘수렴’합니다.


‘태초에’라는 표현은, 어쩌면 그 가능성의 바다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로의 한 번의 수렴, 선택, 붕괴의 지점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즉, 우주는 단 한 번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의 시도들 속에서 드러난 하나의 결과라는 관점입니다.
정관사의 생략은 그런 우주의 다중성(multiple beginnings)을 암시하는, 기막히게 정교한 언어적 설계입니다.
문자 하나하나가 우주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베레쉬트는 단어가 아니라 암호와 상징의 조합입니다.
각 철자는 의미와 수비학적 가치를 담고 있으며, 배치 순서도 고의적입니다.
예를 들어, 베레쉬트의 첫 글자 ‘벳(ב)’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이며, 문자적 의미는 ‘집, 안쪽, 둘의 공간’입니다.
놀랍게도, 우주가 시작되었을 때 나타난 첫 번째 물리적 조건은 바로 내부와 외부의 분리, 즉 ‘공간의 창출’이었습니다.
왜 첫 글자가 ‘알렙(א)’이 아닌 ‘벳(ב)’일까요?
아직 말해지지 않은, 숨겨진 0번째 시작이 존재한다는 암시, 혹은 창조 이전의 창조를 감추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태초에’라는 단어 하나에 담긴 뜻은 단순한 과거형 시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간절히 새긴 우주가 존재하게 된 방식과, 반복되는 시작들 속에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의 필연성과 정교함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었습니다.


엘로힘, 우주의 이름인가? 작동법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문장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히브리어로는 엘로힘(אֱלֹהִים)이라는 단어인데요, 이게 좀 예사롭지 않습니다.

보통 ‘하나님’이라 하면 단수 명사일 것 같죠? 그런데 엘로힘은 문법상 ‘복수형’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복수형 명사가 뒤따르는 동사는 ‘바라’(창조하다)인데, 이건 단수 동사입니다.

자, 여기서 멈춰 생각해봅시다.
‘신들’이 ‘창조했다’가 아니라,
‘신들이 하나의 작용으로 작동했다’는 말입니다.
고대 유대인이 실수했을까요? 아닙니다. 이건 말 그대로, 언어 안에 숨겨진 우주 비밀입니다.


복수의 힘, 하나의 의지


엘로힘은 단순한 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복수의 힘들이 단일한 의지로 뭉쳐 작용하는 구조,
바로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 자체를 담은 단어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다중 프로세서가 하나의 코드를 실행한다”는 개념과 비슷하죠.

과학적으로는 양자역학과도 닮아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 하나가 여러 상태로 동시에 존재(중첩)하다가,
관측이 이뤄지는 순간 하나로 ‘붕괴’되어 현실이 됩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엔 수많은 가능성과 작용성, 정보와 방향성이 담겨 있고,
그게 ‘바라’ – 창조하다라는 명령어를 통해 현실 하나가 톡! 하고 태어납니다.


문자 하나하나가 말하는 우주의 작동


엘로힘은 다섯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던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떠올리며 하나씩 살펴볼까요?


Aleph (א) – 무(無), 말 없는 시작
Lamed (ל) – 흐름, 방향, 가르침
He (ה) – 호흡, 생명, 진동
Yod (י) – 손, 의지, 창조의 씨앗
Mem (ם) – 물, 심연, 감춰진 정보


이 문자들이 모여 말합니다:
“무에서 생명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의지가 정보를 품은 심연 속에서 질서를 만든다.“
그야말로, 우주 작동의 암호입니다.
고대인이 신을 그리지 않고 이름으로 남긴 이유가 이해되지 않나요?
그들은 우주를 작동시키는 ‘힘’ 자체를 형상보다 개념으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 – 그 깊은 이유


고대 유대인들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율법을 굉장히 엄격히 지켰습니다.

왜일까요? 단순히 미신적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우주의 본질적 작동 원리였고, 그걸 형상으로 고정해버리는 것은 진동하는 우주의 실체를 왜곡하는 범죄였던 겁니다.

이걸 보면, 율법주의란 게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고도의 철학과 정보이론에 가까운 세계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엘로힘은 단수가 아닙니다. 복수형입니다. 그러나 단수 동사와 함께 씁니다. 하나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문자 하나하나가 ‘무→생명→의지→정보→질서’를 나타냅니다.

양자역학처럼 확률로 존재하는 가능성들이 하나로 붕괴되어 현실이 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엘로힘은 일반적 신이 아니라 신들중의 신. 즉, ‘우주의 작동 코드’입니다.

“하나님”(엘로힘)이라는 단어 하나 안에
우주의 구조, 시간의 작동, 질서의 태동이 모두 들어있다니…
이 정도면 이제 독자 여러분도 창세기의 첫 줄부터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들지 않나요?


고대의 시와 현대의 과학이 만나는 곳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종교적 문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의 탄생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해놓은 고대 우주론이자, 오늘날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우주 초기 상태의 과학적 묘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천: 하늘( 샤마임,שָׁמַיִם )ㅡ 천상, 위의것들,


즉 보이지 않는것----> 실체화 되지 않은 정보,의식,개념,

허구라고 말하지만 물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것들.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힘.

우주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



: 땅 (에레츠, אֶרֶץ) — 물질세계,

우주초기상태 : 형체 없는 플라즈마의 바다


‘땅’이라 번역된 이 단어는,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막 대폭발 직후, 아직 물질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
고온의 플라즈마로 가득한 우주의 초기 국면을 의미합니다.


전자, 광자, 양성자, 중성자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분리되고, 혼합되던 불안정한 에너지의 바다 —


물질과 반물질의 초대칭상태.
형체는 없지만, 가능성으로는 꽉 찬 그 상태.
이것이 바로 ‘땅’입니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창조신 프타(Ptah)가 “생각으로 땅을 만든다”고 표현되며,
이 땅은 아직 형태 없는 에너지의 바다를 뜻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존재는 가이아(Gaia).
‘대지의 여신’이지만, 사실상 최초의 물질 원형으로,
혼돈에서 처음 나타난 실체화되지 않은 무형의 바다였습니다.

혼돈 (토후, תֹהוּ) — 불확정성의 광란


전자도, 광자도, 양성자도 고온으로 인해 위치를 특정할 수 없던 상태.
즉, 모든 입자가 확률로만 존재하던 불확정성의 무질서.
파동과 입자가 얽히고 섥힌 혼란의 장.
이는 마치 양자역학이 묘사하는, 측정 전의 우주적 불투명성과도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상태를 단 한 단어, ‘토후’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카오스(Chaos)는 바로 이 상태를 의미하며,
구분 없는 어둠과 빛, 위와 아래,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티아마트(Tiamat)는 원초의 혼돈의 바다이자 신성한 물질.
그 속에서 신들이 분화되고, 결국 마르둑이 그녀를 가르며 세계를 창조합니다.

공허 (보후, בֹּהוּ) — 잠재된 모든 가능성


혼돈은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구체화되지 않았던 상태.
그 안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모든 가능성들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허’입니다.

우주를 이룰 모든 입자, 행성, 생명, 의식 —
그 모든 잠재력이 이 시점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공허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펼쳐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죠.
힌두교에서는 이를 수냐(śūnya), ‘공(空)’이라고 불렀습니다.
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은 침묵’이죠.

노르드 신화에서는 세계가 시작되기 전 존재했던 틈, 긴눙가가프(Ginnungagap)가 그것입니다.
차가운 얼음과 뜨거운 불의 에너지가 만나기 전, 끝없는 가능성이 잠든 공간.


흑암 (호셰크, חֹשֶךְ) — 암흑 에너지의 베일


‘흑암’은 단순한 어둠이 아닙니다.
이는 현대 우주론에서 말하는 ‘암흑 에너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암흑 에너지는 오늘날에도 우주 공간을 균일하게 감싸며 팽창을 가속시키는 미지의 힘.

그 당시, 모든 가능성 위에 그것은 이미 지배적인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흑암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휘감고 있는, 창조 이전의 장막입니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창조 전 세계는 어둠 속 물의 바다였습니다.
그 안에는 티아마트와 압수가 잠들어 있었고, 아직 어떤 빛도, 이름도 없었습니다.

이집트 신화에서도 누트(Nut), 하늘의 여신이 펼쳐지기 전,
세계는 어둠의 무형 공간이었으며, 그 안에서 태초의 물(눔, Nun)이 존재했습니다.

깊음 (테홈, תְּהוֹם) — 끝없는 공간, 진공의 바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물이 아닙니다.
이는 아직 구조화되지 않은, 무한한 진공 공간.
빛도, 시간도, 구조도 아직 생기지 않은, 끝없는 우주의 바탕입니다.
모든 파동이 자유롭게 진동할 수 있고, 간섭도 질서도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 —
바로 ‘진공 양자장’의 무한한 필드, 그 자체입니다.
수메르 신화에서 이와 비슷한 개념이 압주(Abzu)입니다.
지하에 존재하는 원초의 물, 그리고 생명의 원천.
창조신 엔키는 이 압주에서 나옵니다.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카(Ka)’라는 말로 “이 모든 존재는 누구의 의지인가?”를 묻습니다.
‘카’는 의미 없는 질문 같지만, 그 자체가 존재의 심연에 대한 고대적 성찰입니다.

하나님의 영 (루아흐 엘로힘) — 우주의식의 깨어남


그리고 이 깊은 진공 위를 감싸는, 하나님의 영.
이는 특정한 존재의 숨결이 아니라,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 혹은 정보장(Information Field)의 첫 깨어남.
모든 가능성 위를 맴돌며, 무언가 창조될 준비를 하고 있는 거대한 의식.
그것은 지능적인 파동의 흐름이며, 창조적 정보의 진동이기도 합니다.


Ruach (רוּחַ) = 바람, 영(Spirit), 숨결 – 생명과 의식의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Elohim (אֱלֹהִים) = 신(God) 또는 창조적 힘 – 복수형 명사지만 단수 동사와 함께 쓰이는 독특한 구조로, 앞서 이야기했던 창조 원리의 통합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 = “창조의식을 품은 진동하는 생명의 흐름”


이는 힌두의 프라나(Prāṇa) — 우주를 흐르는 생명의 호흡과 같은 개념과 겹칩니다.


도교에서는 이 흐름을 기(氣)라고 부르며, 모든 만물의 근원 에너지로 여겼습니다.


이런 개념은 ‘신의 영’이라는 인격적 개념보다는,

정보장, 창조의 의지, 또는 우주의 작동명령과 더 유사합니다.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메라헤페트)

— 진공 속의 양자 요동



‘운행하셨다’는 히브리어 ‘메라헤페트(מְרַחֶפֶת)’는
새가 알을 품듯 떨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 —
완전한 진공조차도 에너지 입자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사라지는 현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모든 것이 잔잔해 보이는 그 수면 아래, 창조는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힌두 신화에서는 비슈누가 우유의 바다 위에서 잠들어 있고,
그의 배꼽에서 브라흐마가 피어납니다.
또한 신들과 악마들이 우주의 산을 회전시켜 바다를 휘젓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이는 창조 전, 무에서 유가 생성되기 위한 ‘교반의 시간’을 상징하죠.

이처럼, 창세기 1장 2절의 상징 하나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현대 과학이 묘사한 우주의 초기 상태와 대응됩니다.

고대인들이 그토록 제한된 도구와 지식으로
어떻게 이런 통찰에 도달했는지,
우리는 두 가지 가설 중 하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연의 일치 — 그러나 너무 정교합니다.


우주의식과의 접속 — 고대의 선지자와 현자들이 우주 정보장과 공명했을 가능성.



어느 쪽이든, 이 장면은 단순한 신화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과 상징, 직관과 수학, 신성과 진공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창세기의 이 일곱 단어들은, 단지 창세기 만의 것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인들은 비슷한 상징과 단어로 우주를 말하려 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신들, 신화 속에 ‘무질서한 혼돈에서 질서로, 깊음에서 생명으로, 공허에서 구조로’ 넘어가는 창조 패턴은 공통적으로 반복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보편적 직관,
혹은 인류가 ‘정보장’과 접속했던 순간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창세기와 현대 과학이 만나는 지점



창세기는 신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정보장의 기억을 인간이 번역해낸 기록일 수 있습니다. 고대인은 도구도 없고, 망원경도 없었지만 — 정보장과의 공명을 통해 본 것을 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지금, 수천 년을 넘어 우리의 뇌와 공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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