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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뇌

by 무이무이

파동, 의식, 그리고 현실의 비밀에 대하여


우리가 정말 ‘본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실제와 허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의 뇌는 분명히 ‘실제’를 인식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세상의 물질적 실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뇌는 ‘허구’도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념, 개념, 상징들 — 때로는 그 허구가 실제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한가지 생깁니다.


우리가 실제로 믿는 허구는 정말 허구일까요?

사람들이 공통으로 믿고 살아가는 어떤 생각이 사회를 움직이고, 제도를 만들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면, 그것을 단지 허구라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허구’라는 것, 허구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뇌가 믿고 공명하며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개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적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와 허구의 경계에서

“허구를 믿는 뇌, 실제를 창조하다”



저는 얼마 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하라리는 현생 인류가 네안데르탈인과의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인간은 허구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국가, 돈, 종교, 윤리, 신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힘, 그 믿음이 사람들 간의 협동을 가능하게 했고, 결국 문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과연 그것들이 정말 ‘허구’일까?

우리가 함께 믿고 따르는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일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의식의 정보’에 접속하여 그것을 현실 속으로 불러오는 존재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즉, 우리는 허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주에 이미 존재하던 정보를 뇌라는 수신기를 통해 감지하고, 의식이라는 안테나를 통해 현실화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파동, 현실을 흔들다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를 드러내는 방법”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나누자면,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은 눈에 보이지만, 파동은 그렇지 않지요.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는 다양한 매질(전달 물질)을 통해 이 보이지 않는 파동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대부분 사물의 형태이지만, 그 형태를 이루는 본질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본질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파동’입니다.

파동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의 진동(음파)은 보이지 않고, 빛을 포함한 전자기파도 대부분의 파장은 우리 눈에 감지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이라는 매질을 이용하면, 우리는 파동을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잔잔한 연못을 떠올려보세요.

그 위에 돌을 하나 툭 떨어뜨리면, 동심원 형태로 퍼져나가는 파문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파문은 에너지를 진동의 형태로 전달하지만, 물 그 자체는 제자리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러 개의 돌을 동시에 던진다면, 그 파문들은 서로 만나 간섭하며 물 위에 복잡한 줄무늬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만약 그 간섭이 일어나는 지점을 한순간 뚫어지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마치 그곳에서 물방울 하나가 튀어 오르거나 움푹 꺼지는 것처럼 점 하나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 물이 보여주는 파동의 또 다른 특성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물을 자유 낙하시켜 보면, 물방울은 공중에서 아주 완벽한 구형을 이룹니다.

이것은 물의 응집력에 의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파동이 중심을 향해 수축하는 성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한편, 잔잔한 수면 위에서 퍼지는 파문은 바깥을 향해 확산하는 구형 파동의 단면입니다.

즉, 물은 파동의 두 가지 방향성 “안으로 수축하는 응집의 힘과 밖으로 퍼지는 확장의 운동”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처럼 파동은 끊임없이 진동하며, 안팎으로 진동을 퍼뜨리고 다시 수렴시키는 운동 속에서 존재의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입자와 파동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파동은 에너지의 진동이고, 입자는 그 파동들이 교차하면서 순간적으로 모양을 갖춘 실체

— 즉, 잠시 드러나는 ‘존재의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은 이렇듯 파동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신비한 물질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뇌는 어떨까요?

혹시 뇌도, 우주에 이미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정보를 현실로 드러내는 하나의 매질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다면, 그 생각은 정말 ‘여러분의 것’일까요? 혹시 그 생각은,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조율한 주파수를 통해 감지된 하나의 파동일 수는 없을까요?



뇌, 색을 해석하다.

우리는 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색이라는 개념"을 "실체화"한다


우리가 색을 인식하는 방식도 앞서 이야기한 파동과 비슷합니다.

‘빨간색’이라는 물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빨간색에 해당하는 특정 파장의 빛을 눈으로 받아들이고, 뇌는 그 신호를 해석하여 ‘빨간색’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즉, 뇌가 빛의 파장을 조율해 그것을 하나의 색으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빨간색’이라는 색이 우리 눈에는 분명히 빨갛게 보이지만, 모든 생물이 똑같이 이 색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색을 감지하며, 어떤 생물은 아예 빨간색 파장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색약이나 색맹과 같은 차이가 존재하죠. 즉, ‘빨간색’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실체가 아니라, 각 생명체의 수용기관과 뇌 구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파동의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빨간색이라는 파장은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물리적 정보이지만, 같은 파장이라도 생명체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드러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파동이 ‘물’이라는 매질을 통해 눈에 보이는 파문으로 드러나듯이,‘빨간색’이라는 개념 또한 오직 인간의 뇌라는 매질을 통해서만 지금 이 현실 속에서 특정한 색깔로 실체화됩니다.


결국 빨간색이라는 색은 외부에 존재하는 파동이며, 그것은 인간의 뇌를 통과할 때 비로소 ‘색깔’이라는 의미와 형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빨간색은 인간 의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된, 보이지 않는 파동의 실현인 셈입니다.



의식이라는 안테나

“사랑과 영감은 어디서 오는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의 뇌에서 발생하는 주파수가 공명하여,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던 ‘사랑이라는 정보’와 연결될 때 드러나는 실재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들의 뇌파는 우주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사랑의 파동과 맞물리며, 그 진동이 현실화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지 남녀 간의 사랑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성애, 부성애, 이타심, 봉사, 희생 — 이 모든 것들도 어쩌면 우주에 저장된 ‘의식의 형식’들이고, 인간은 그와 연결될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뇌는 단지 생각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아니라, 우주와 연결된 하나의 안테나입니다.

우리는 그 안테나를 통해 우주의 기억에 닿고, 거기서 오는 영감을 받아 현실에 구현합니다. 그래서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도 비슷한 진리에 동시에 도달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같은 순간, 같은 우주의식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철학적인 상상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은 이미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입자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며, 관측을 통해 파동이 입자로 수렴된다고요. 현실은 관측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의 의식은 단순한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우주의식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정보, 파동, 그리고 기억의 장

“우주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기억을 ‘개인의 뇌’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억은 물리적인 뇌를 넘어서는, 더 넓은 차원의 정보장 속에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나비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비행을 하고, 철새가 매년 정확한 방향으로 이동하며, 연어가 수천 킬로미터를 돌아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과연 단지 유전자의 명령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자연의 행동은 어쩌면 각 개체가 ‘기억의 장(field of memory)’에 접속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생명 전체에 깃든 정보의 흐름이며, 그 기억은 파동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루퍼트 셸드레이크의 ‘형태공명 이론(morphic resonance)’과도 통합니다. 그는 유기체들이 공유하는 정보장이 있으며, 한 개체가 습득한 행동이나 형태는 동일한 종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기억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우리가 문득 떠오른 직관, 설명할 수 없는 영감, 혹은 처음 마주한 장소에서 느끼는 강한 낯익음 이것들 역시 뇌의 내부 작용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파동 정보장에 접속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부의 파동에 공명할 때, 그 기억은 내 것이 되어 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의 정보를 불러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파동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정보도, 지금 이 순간에 접근 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직관이 때때로 미래를 암시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미 존재하는 미래의 파동 정보장에 잠시나마 접속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파동이며, 그 파동은 특정 조건에서 우리 의식을 통해 현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뇌’입니다. 뇌는 생각의 주체이자, 파동을 감지하고 해석하고 구현하는 도구입니다. 결국 기억이란, 한 개인의 뇌 속에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파동의 잔상입니다. 우리는 그 파동을 “느끼는 자”, “선택하는 자”, 그리고 “현실화하는 자’입니다.”


"뇌는 물이다:

공부는 저장이 아닌 위상 변화다"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지식을 많이 쌓으면 똑똑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어디에 저장하는걸까.

만약 인간의 뇌가 컴퓨터의 CPU라면 저장장치는 내부에 있을까, 외부에 있을까?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진짜 어떤 변화일까?
단지 정보를 뇌에 저장하는 걸까?”

아닙니다. 공부란 저장이 아닙니다.
공부는 뇌의 위상(phase)을 바꾸는 일입니다.

뇌는 하나의 매질입니다. 그리고 그 매질은 고체도, 기체도 아닌
‘물과 같은 성질’을 가집니다.

물은 아까도 말했지만 아주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유연하며, 담는 그릇에 따라 형태가 바뀌죠.
하지만, 온도가 낮아지면 단단한 얼음이 되고,
너무 뜨거우면 증발하여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연한 뇌는 어떤 정보든, 어떤 감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심지어는 아직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우주의식마저 반영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경직된 뇌를 가집니다.
오래된 신념, 무비판적 수용, 감정적 상처 등으로
뇌의 구조가 마치 고체처럼 굳어져 버립니다.
그 상태에서는 강한 우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치 얼음에 금이 가듯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충격은 때때로,
트라우마가 되고,
현실 거부가 되고,
깨어지지 않는 고정관념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뇌를 다시 물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공부의 진짜 의미입니다.
책을 읽는 것, 깨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때때로 낯선 사유 속에 나를 던지는 것.
이 모든 것은 정보를 축적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1. 공부란, 뇌가 더 유연해지기 위해 '위상 변화'를 겪는 과정입니다.
2. 뇌가 다시 물처럼 흐를 수 있게 하는 작용입니다.

명상, 철학, 사색, 대화.
이 모든 행위들은 얼어붙은 뇌를 해빙(解氷)시키는 도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금 우주와 공명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는 정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바꾸는 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 고대가 먼저 본 우주의 얼굴

잊혀진 직관, 되살아나는 진리”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앞 장에서, 의식이 뇌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우주 정보장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파동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파동은 우리 뇌라는 ‘안테나’를 통해 현실 속에 드러난다는 관점도 이야기했지요. 이제 여기서부터는, 바로 그 ‘의식’이라는 신비를 향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인간은 왜 이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 품은 의문 같지만, 이미 수천 년 전 고대인들도 똑같이 질문해 왔습니다. 고대의 문명은 과학이라는 도구가 없던 시절, 오히려 더 절실히 이 질문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논리보다 상징을, 공식보다 은유를 사용했지만, 오히려 그 직관은 놀라울 만큼 본질에 가까운 해답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가 ‘브라흐만의 숨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고, 이집트에서는 태초의 물과 진동 속에서 ‘빛’이 최초로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는 ‘혼돈 속에서 질서가 솟아오르는 첫소리’가 등장하며, 성경에서는 “빛이 있으라”는 선언이 최초의 창조 행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현대 물리학이 설명하는 빅뱅 이론의 핵심 개념 — 즉, 에너지의 폭발, 파동, 진동, 질서의 형성 — 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고대인들은 고성능 망원경이나 수학 모델 없이도, 직관적 명상을 통해 우주의 기원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 ‘의식’이 반드시 개입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우주는 단지 물질의 구조가 아니라 의식을 품은 존재이며, 인간은 그 의식의 일부이자 통로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사유는 단순한 신화로 치부되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다시 그것을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 정보이론, 다차원 우주론은 이제 의식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고, 둘의 상호작용을 우주의 본질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고대의 신화는 상징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과학 이전의 과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는 누구인가?”“왜 너는 생각하고, 느끼고, 존재하는가?”그 물음에 답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인간이 아니라, 우주의 의식이 깨어나는 지점을 비추는 존재가 됩니다.



고대 신화와 현대 물리학이 만나는 순간

시간과 공간 이전의 기억, 그리고 ‘빛’의 선언


고대인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과학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망원경도, 입자 가속기도 없었고, 수식과 이론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을 관찰하고, 내면의 직관에 귀를 기울이며, 놀라운 통찰을 돌판과 양피지, 점토판과 사원 벽에 남겼습니다.


초대칭 상태(Supersymmetry)


그들의 창조신화와 경전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공통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의 창세기 1장 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그리스 신화에서 우주는 ‘카오스(Chaos)’로부터 비롯되고, 중국의 『혼돈(混沌)』 개념 또한 형태 이전의 모든 것을 포함한 미분화의 상태로 등장합니다. 힌두 신화의 ‘프라라야(Pralaya)’는 창조 이전, 또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 무로 돌아가는 암흑의 주기입니다.

놀라운 것은, 현대 물리학 또한 우주의 시작을 ‘무언가 이전의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본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초대칭 상태(Supersymmetry)’는 입자와 반입자, 에너지와 질량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말 그대로 분리 이전의 상태입니다. 이 균형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무너지면서, 물질과 반물질이 쏟아져 나오고, 이 비대칭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존재하게 된 세계가 시작되었지요. 마치 신화 속 “질서의 탄생”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CMB)


그리고 거의 모든 신화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빛이 있으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이집트 창조신화에서 라(Ra)는 빛으로 세상을 밝히며 태양의 신으로 등장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가 우주의 어둠을 깨고 첫 빛을 창조합니다. 중국 태고 신화에서도 태초의 어둠을 가르고 양(陽)의 빛이 떠오릅니다.


이 신화 속 ‘빛의 시작’은, 현대 물리학이 설명하는 ‘코스믹 라이트 쇼’, 즉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CMB)와 연결됩니다. 우주의 나이가 약 38만 년 되었을 무렵, 빛은 비로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이때의 빛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바로 그 빛이 “우주 탄생 직후의 ‘기억’”인 것입니다.


상대성 이론


또한 상대성 이론은 이 빛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빛의 속도는 모든 기준계에서 동일하다.”이것은 우주에서 시간과 공간의 기준이 바로 빛의 속도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거리의 척도는 모두, 그 최초의 빛 — ‘빛이 있으라’는 선언 이후에 정의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칭 상태가 깨어지며 입자인 전자와 반입자인 양전자가 쌍소멸 하여 입자이면서 반입자인 광자 2개를 방출하고 광자는 다시 전자와 양전자를 쌍생성하는 이 빛의 주기가 곧 절대 속도이고 반대로 가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는 기준.

결국, 고대의 신화 속 언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우리가 물리학이라는 언어로 풀어내고 있는 우주의 탄생 과정과 본질에 접근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일치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치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고대인들은 직관과 상징, 신화와 경전을 통해 지금 우리가 과학으로 탐구하고 있는 우주의 생성 원리와 의식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의 장에서, 고대 문명이 남긴 경이로운 기록들 속에 담긴 ‘순서 있는 창조’의 흐름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특히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우주 창조의 6일, 그리고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개념이 단지 종교적 상징이 아닌, 물리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우주 진화의 과정과 놀랍도록 정확히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탐구할 것입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는 선언부터 시작하여, 공간의 분리, 생명의 탄생, 인간의 출현, 그리고 마지막 ‘안식’이라는 개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창조의 순서가 실제로 우주가 진화해 온 경로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고대 기록이 단지 상상이나 신화가 아니라 고도의 과학적 언어로 암호화된 우주의 기억일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처럼 정교한 창조의 설계도를 인류에게 먼저 알려주었던 것일까? 그리고 인간은 왜, 이 설계도를 해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바로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지금부터 함께 시작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의 중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왜 우주는 만들어졌을까요? 그 거대한 탄생에는 목적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확률과 우연의 산물이었을까요? 그리고 만약 이 우주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면,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인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수많은 별과 은하, 블랙홀과 행성들 사이에서, 오직 인간만이 우주를 관측하고,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단순한 생존과 진화를 넘어, 인간은 정보를 해석하고, 의식을 확장하며, 존재 그 자체를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마치 우주가 인간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가장 오래된 질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철학적인 명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가 인간이라는 창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고, 자신의 기원을 자각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고대 언어에 새겨진 우주의 기억

돌 위에 새긴 과학, 신화 속에 감춰진 진실


우리는 이제,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기록들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글을 쉽게 쓸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려 하루에도 수천 개의 단어를 쏟아낼 수 있지만, 고대에는 텍스트 하나를 남기는 일이 삶 전체를 걸어야 할 만큼의 엄숙한 작업이었습니다. 돌판에 문장을 새기고, 양피지에 글자를 붓으로 눌러 적을 때, 사람들은 단어 하나하나에 우주의 진실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문장은 지금의 언어보다 훨씬 압축적이고 상징적이며, 동시에 경이롭게 정교합니다.


“태초에…”


‘태초’라는 말로 성경 창세기는 시작됩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단지 “처음”이었다면 ‘처음’이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왜 굳이 ‘태초’라고 했을까요?‘태초’는 단지 시간의 시작이 아니라, 수많은 시작들 중 특정한 하나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는 곧 우주가 순환 구조를 가졌으며, 지금 우리가 속한 이 우주는 그 수많은 순환 중 ‘의식의 진화’에 성공한 하나의 시작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 한 단어 속에 이미 ‘다중 우주’, ‘우주 순환론’, ‘엔트로피와 정보의 재생성’ 같은 개념이 암시되어 있는 셈입니다.


“수면 위에…”


‘수면’이라는 표현도 놀랍습니다. 초기 우주는 물이 없었을 텐데 왜 수면(水面)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물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잠재된 완전한 평형 상태, 즉 "초대칭 상태에서의 ‘정보의 장’"을 은유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파동이 퍼지기 전의 잔잔한 물의 표면, 아직 형태가 결정되지 않은 잠재성의 장을 가리킵니다. 그 위에 ‘영’이라는 떨림이 운행했다 ‘는 것은, 의식의 씨앗, 즉 우주를 깨우는 파동이 그 수면 위를 지나가며 질서를 일으켰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현대 물리학에서는 우주적 진공상태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쌍생성되고 쌍소멸 하는 양자 요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이 문장은 창세기에서 가장 신비로운 문장 중 하나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운행하다’는 단어는 메라헤페트 (מְרַחֶפֶת)로, 이는 단순히 ‘움직이다’가 아니라, 새가 알을 품으며 미세하게 떨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 ‘떨림’은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우주 생성 이전의 진공 상태에서의 양자요동과 매우 유사합니다. 즉, 창세기의 표현은 우주가 태동하기 직전의 에너지 떨림, 정보의 진동, 진공 속 미세한 불균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고대의 텍스트 속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엄청난 과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화가 상상력이 아니라, 과학보다 앞서 표현된 우주의 설계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여기서 열리는 것이지요. 이후에는 창세기의 6일 창조 과정과 현대 우주 진화 과정을 비교하며, 그 정확한 순서와 개념의 대응 관계를 깊이 있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창세기를 주목하는가


전 세계의 고대 문명은 놀랍도록 비슷한 이야기로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베다, 바빌로니아의 에누마 엘리쉬, 고대 중국의 혼돈 개벽 신화, 북유럽의 이그드라실 신화, 한국의 단군 신화까지 —이 모든 신화들에는 하나같이 ‘혼돈에서 질서로’, ‘무(無)에서 유(有)로’,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되는 우주 창조의 흐름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공통된 흐름 속에서 인간이 누구인지,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의식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고대인의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창세기’를 중심에 놓고 살펴보려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 저자는 종교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음을 미리 알립니다. 우주는 모든 가능성의 장이므로 )

창세기는 수많은 창조 신화들 중에서도 특히 ‘우주 생성의 순서’와 ‘진화 과정의 단계’를 가장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는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의식 철학까지 — 현대 과학이 수천 년에 걸쳐 밝혀낸 사실들이 단 31절의 압축된 문장 속에 놀랍도록 정연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 어려운 암호화된 지식의 구조이며, 인류가 오랜 시간 직관과 명상을 통해 우주의 법칙을 기호화하고 보존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창세기를 단지 종교적 기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원형 기억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상징과 은유는 단지 신화가 아니라, 우주와 의식의 본질을 풀어내는 해석 키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내 머릿속의 생각을 내려놓고 우주의식의 정보장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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