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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빛이 있으라.1

죽음은 탄생보다 아름답다

by 무이무이

ㅡ제 글 중에서 [눈 깜박할새, 빛은 몇 번 깜박할까?]를 같이 읽어주시면 더 읽기 편하실 것 같습니다ㅡ

https://brunch.co.kr/@anymoonmuimui/29



시간과 존재의 첫 심장박동


태초의 우주는 고요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아무 빛도 없었습니다.
그곳엔 오직 10억 쌍의 물질과 10억 쌍의 반물질만이
정교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팽팽하게 맞선 저울처럼,
우주는 완벽한 대칭 속에서 38만 년을 버텼습니다.
우린 이 상태를 [초대칭]이라 부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주가 미세하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양자요동 —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그 미세한 진동이 한 개의 입자를 더 만듭니다.
아주 작은, 그러나 우주 전체의 운명을 바꿔버릴 차이.

이 한 개 때문에 균형은 무너집니다.
10억 대 10억 + 1.
대칭이 깨지는 순간,
우주는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듯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닫고 단 하나의 현실이 됩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렇게 상상했습니다.

1.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가 들어있습니다.

2. 상자 속에는 방사성 원자와

3. 그것을 감지하는 장치,

4. 그리고 독가스가 함께 있습니다.

5. 원자가 붕괴하면 장치가 작동해 독가스를 방출하고,

6. 붕괴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남습니다.


문제는, 원자의 붕괴 여부가 양자역학적 확률로만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첩(superposition) 상태입니다.


우주의 탄생 직전,

우리의 우주도 이 고양이와 같았습니다.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


그런데 단 하나의 사건 —

양자요동에 의해 물질 입자가 하나 더 태어나는 순간,

10억 쌍의 물질과 반물질이 모두 사라지고,

1개의 물질만이 남게 됩니다.

우주의 상자가 열린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고양이 쪽 우주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날 이후, 다른 모든 가능성의 우주는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단 하나의 ‘관측된 우주’ 속에서

시간과 빛과 존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억 개의 물질과 10억 개의 반물질이

서로를 만나 쌍소멸 하며 광자로 변한 것입니다.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반입자입니다.

광자 두 개가 만나면 다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전자와 양전자가 태어납니다.


생성과 소멸의 무한한 숨결.

이것이 바로 빛의 주기입니다.


> 더 빠른 속도는 없다.

> 더 짧은 주기도 없다.

> 빛의 주기는 곧 시간의 진동이다.


그래서 빛은 시간을 느끼지 않습니다.

150억 년 전 처음 태어난 그 빛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과,

그리고 우리 몸 안에도 있습니다.

그 빛에게는 어제도, 내일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만이 있습니다.




우주의식이 만들어낸 음향, 양자요동, 그리고 빛의 탄생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구절은 단지 신화 속 선언이 아니라,

우주의 물리적 조건이 선포된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시작은 완전한 대칭 상태에서

단 하나의 요동, 양자요동(quantum fluctuation)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양자요동은 진공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며,

입자와 반입자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진동입니다.


진동은 파동이고, 파동은 소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인식하는 방식은 진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진동이 있는 곳에 소리가 있고,

양자요동이 있는 곳에 음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는 선언은

우주의 진공 속에서 발생한 최초의 진동,

곧 우주의식이 만들어낸 음향으로서의 양자요동을 의미합니다.


그 음향은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모든 가능성을 붕괴시키고 현실을 드러내는 명령이었습니다.

바로 그 진동, 그 음향이 빛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양자요동은 우주의식이 만들어낸 음향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선언은 곧 진동이자, 창조의 파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바로 빛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소리’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날, 그것은 첫 번째 주기



창세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문장을 ‘하루가 흘렀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하루의 길이나 시간의 측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 최초의 주기, 곧 빛의 주기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빛은 한 번 만들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은 전자와 양전자의 쌍소멸과 쌍생성,
즉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고 사라지며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이것이 빛의 주기이며,
그 주기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기서의 저녁은 빛이 사라지는 순간, 즉 소멸의 시점입니다.
모든 만물이 잠잠해지고,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에너지의 수렴입니다.
그리고 아침은 빛이 다시 생성되어 퍼져 나가는 확산의 시작입니다.

이 순환이 바로 고대인들이 이해한 우주의 생명 리듬이었습니다.
단순히 해가 지고 뜨는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생성과 소멸, 에너지의 숨과 쉼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는 말은
12시간이 지나 하루가 흘렀다는 의미가 아니라,
빛의 탄생과 사라짐이라는 ‘우주 최초의 주기’가 완성되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개념은
바로 이 빛의 진동, 이 창조적 리듬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화하는 일



빛이 온 공간을 휘젓는 순간
수많은 가능성 속에 떠다니던 우주는
단 하나의 현실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미 실체화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산, 강, 별, 나무, 도시…
이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된’ 현실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기 전부터,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체화되지 않은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망원경으로도, 현미경으로도 잡히지 않는 것들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용서,
자비, 감사, 기쁨, 평화,
겸손, 신뢰, 용기, 인내,
배려, 연대, 진리, 자유,
아름다움, 선함, 정의...........

이것들은 우리가 관측하고 선택해야만 현실이 됩니다.
마음속에 품고,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이 세상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우주의식은 물질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무형의 가치를
빛처럼 발산하며 살아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주어진 세상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품은 마음이, 내일의 우주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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