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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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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Mar 13. 2020

제주에 사는 건 어때요?

짧은 버전과 긴 버전이 있습니다만,

얼마 전 놀러 온 지인이 물었다. 제주에 사는 건 어때요? 


올 3월로 우리의 제주살이는 4년을 꽉 채웠는데, 4년 내내 받은 질문이지만 받을 때마다 여전히 멈칫한다. 묻는 이의 의도에 부합하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상대가 저도 제주에 살아보고 싶어서요, 라고 하면 제일 간단하다. 그럼 정말 서울에 살다 제주에 살아보니 어떤 게 기대와 같고 달랐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묻는 이가 나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때도 어렵지 않다. 조금 말을 고른 후에 답한다. 


별로 안 친한 사이의, 가벼운 인사치레가 가장 어렵다. '제주에 사는 건 어때요?'는 제주살이에 대한 질문 같지만, 제주에 사는 지금 내 삶의 전반적인 만족도와 직결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 속내를 얘기해도 돼요? 아니면 혹시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에요? (지나가는 질문이라면 그냥 좋다고 답한다. 어... 자연이 정말 좋잖아요?)

물론 제주의 자연은 정말 좋다. 좌 출근길, 우 퇴근길

속내를 말해보자면, 제주에 사는 건 좋다. 좋아서 4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한동안 살 것 같다. 왜 좋은지를 생각해봤다. 내 책에도 쓴 적 있지만 제주에 사는 건 단지 물리적으로 서울에서 먼 섬에 산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 삶이 중심부로부터 받는 압력 자체가 훨씬 약하다. 


가끔 남편과 내가 서울에 사는 30대의 문화적인 일을 하는 신혼부부라고 가정해본다. 이 부부가 일상이 충만하다고 느끼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주말 나들이, 가끔 외식, 전시나 영화, 공연 같은 문화생활, 대형 마트에서 장보기 등등. 실제로 그래서 얼마나 쓰느냐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아무튼 다 돈을 써야 하는 것들이다. 도시에서 소소한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으나 크나 지속적인 소비가 필수다.


그러나 우리는 제주의 시골에 산다. 같은 제주라 해도 제주시 도심과 그 외 시골 지역의 생활 패턴은 천차만별인데, 우리는 ‘리민’이다. 전시, 영화, 공연을 자연스레 일상에서 지우게 된다. (괜찮다. 우리에겐 넷플릭스가 있다.) 대형 마트는 두세 달에 한 번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만 제주시로 원정을 간다. (괜찮다. 우리에겐 하나로마트가 있다.) 


외식은 술을 꼭 마셔야 하는 우리 부부에게 굉장한 결심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괜찮은 술집이 없기 때문이다. 외식을 결정하면 일단 버스로 어떻게 이동할지 작전을 짠다. 서울에서는 별 게 아니지만 대중교통이 촘촘하지 않은 시골에서는 상당한 회의를 요한다. ("그러니까 일단 금성리 정류장에서 202번을 타고 애월 읍내에서 102번으로 갈아탄 다음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서 거기서 다시 택시를 타고...") 우리 부부에게 좋은 술집은 근처에 102/202번 버스 정류장이 있는 술집이다. (하지만 역시 괜찮다. 나에게는 요리 꿈나무 남편-안주 전문-이 있다.) 

술집이 없으면 집을 술집으로...

이 빈 틈을 자연이 채운다. 요즘처럼 마감이 끝나 회사 일이 많지 않은 때에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남편과 산책을 간다. 가장 가까운 바다가 곽지 해수욕장인데, 집에서 천천히 걸어가면 20분 정도 걸린다. 해수욕장 끝까지 걸어 방파제를 찍고 돌아오면 1시간 코스다. 


이 코스를 기본으로,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귀덕 포구 해안도로 쪽으로 가기도 하고 어도오름 쪽으로 가기도 한다. 나는 겨울이 끝났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그날부터 매일매일 여름을 기다린다. 이윽고 여름이 오면 꼭 샌들을 신고 산책을 간다. 바다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다. 그리고 걸으면서 남편과 온갖 얘기를 한다.


물론 이렇게만 쓰면 오해의 여지가 있다. 마치 소비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물욕 없는 현대인처럼 우리 부부를 그리지 않았는가. 진실을 말하면, 남편은 정말 빈 틈을 자연으로 채우며 물욕이 거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반면 나는 그 와중에도 주기적으로 제주시 나가고 회사 동료들과 핫플 찾아다니며 소비 진작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해보겠다. 로컬 매거진 에디터로서 나는 요즘 제주 핫플들의 트렌드를 틈틈이(강조1), 내 돈을 좀 써가며(강조2),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애써 찾아다니지 않는 이상, 물욕을 자극하는 것들과 꽤 쉽게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로마트를 예로 들어보자. 제주 전역을 꽉 잡고 있는 유통망인 하나로마트는 어느 지점에 가도 물건이 거의 동일하다. 브랜드 또한 아주 제한적이다. 샴푸를 사러 갔다면 대충 한 칸 안에서 보고 고르면 된다. 물건이 다 고만고만해 웬만해서는 물욕을 자극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게 된다. 


차는 어떨까. 제주의 시골에는 아니? 저 차가 아직 굴러간다고? 하는 차가 상당히 남아 있다. 부농/땅부자/유지들이 때로 찝, 디스커버리 등 멋진 수입차를 몰고 다니나, 결국 그들도 나도 같은 험로를 달린다. 똑같이 먼지 뒤집어쓰고 흙탕물 밟고 나뭇가지에 잔기스 난다. 그리고 하나로마트 간다. 내 차에 다들 딱히 관심 없다.

참고로 우리는 290만 원 주고 산 2000년형 산타페를 탄다.

소비의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한편,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시부모님과 이웃 생활을 하고 있는데, 타지에서 외딴 시골집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시부모님이 의지가 될 때가 많다. 남편이 서울에 갔는데 집에 무슨 일이 생긴다든지, 갑자기 남편이 아프다든지, 마당 관리라든지, 마당 관리라든지, 마당 관리 같은 상황에 특히 의지가 된다. 


5년 차로 접어드니 이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거의 확실한데, 남편은 프리랜서/집돌이 생활이 꽤 잘 맞다. 평론가로서 그의 재능이 조금 아깝다고는 생각한다. 그래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서울이었다면 아무래도 바가지를 긁었을 것 같다. 긁기 전에 이미 일을 하고 있었겠지만. 


제주에 사는 건, 뭐랄까 행복에 있어 나의 자율성이 좀 더 큰 느낌이다. 좀 적게 벌어도 괜찮고(시골에 산다는 느낌이 없어서 못 쓴다는 느낌을 상쇄시킨다), 일단 살아지는 대로 살아봐도 괜찮다(어차피 그러려고 제주 왔다. 정석대로 살 거면 서울 있지). 첫 한두 해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았다. 이게 맞나? 이래도 되나? 시간이 흐르면서 괜찮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풀릴 일은 알아서 풀려 갔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제주살이는 남편과 나의 부부 중심성을 무척 단단하게 다져 주었다. 이렇게 말하면 주제넘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4년 동안 좋은 인생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버린 느낌이다. 매일 산책하며 더 바랄 게 있을까 묻는다. 


노부부가 거친 인생을 헤치고 말년에 깨달을 법한 생의 비밀을 너무 일찍 깨달은 기분이 되어 때로는 우리가 너무 치열하지 못한 것 같다. 젊을 때는 중심부의 압력을 견디고 그 안에서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닐까, 자문한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괜찮아졌다. 그 반문이야말로 반문하기 위해 하는 거 아닌가, 다시 반문하게 됐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을 거다. 제주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만족스럽다. 그게 제주에 사는 건 어때요? 하는 질문을 받을 때 내가 하는 생각들이다.




사랑에 관한 글을 써 왔다. 〈대학내일〉〈주간 경향〉에 연애 칼럼을 썼고, 2014년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라는 연애와 사회를 다룬 공저에 참여했다. 결혼 생활을 거치며 ‘페미니스트도 결혼해서 잘 살 수 있을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를 썼다. 고양이 두 마리, 남자 사람 한 명과 2016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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