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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Apr 15. 2020

제주의 기후 변화, 이대로 좋은가
&과연 어디로 가는가

랑은 사실 하나도 관련 없는 요즘 먹고 산 이야기


4월이 유독 춥다. 며칠 전 제주엔 폭설이 왔다. 물론 산간 얘기지만, 4월에 폭설이라니. 작년 사진을 봐도 올 4월이 춥다는 걸 알 수 있다. 페북과 구글 포토가 n년 전 오늘이라며 옛 사진을 보여주는데 청자킷이나 훨씬 가벼운 옷을 입고 있다. 요즘은 여전히 폴라티를 입고 패딩을 걸친다. 


제주에 오고 4번의 겨울을 맞았는데 그 겨울이 매번 달랐다. 첫 해 겨울을 겪고 아, 제주의 겨울은 이렇구나 생각했다. 우리 집은 제주의 북서쪽 해안인데 겨울에 흐리고 바람이 차기로 유명한 동네다. 첫 해 겨울의 인상적인 풍경은 잔뜩 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쨍하게 비치는 햇살이었다. 뜬금없이 중학교 때 영어 시간에 배운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에브리 클라우드 해즈 어 실버라이닝. 그 실버라이닝을 처음 제대로 봤다. 겨울 내내 우리 동네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그런데도 먹구름 사이로 난 구멍으로는 화사한 빛이 찾아들었다. 구름 뒤는 여전히 맑다는 건데, 그게 신기해서 산책할 때마다 저거 봐, 하곤 했다. 


그 다음해 겨울은 어마어마한 폭설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제주는 아무리 눈이 와도 해안가엔 쌓이는 일이 없다고들 한다. 그 해엔 쌓였다. 일주도로도 체인 없이 오다니지 못할 지경이라 버스를 타고 출근한 게 몇 번 된다. 눈 오는데 차를 끌고 나갔다가 미끄러지는 일을 몇 번 겪고, 다음해 겨울이 오기 전에 체인을 샀다. 내년을 대비해야 해요, 호들갑 떨며 회사 동료들과 공구했다. 다음 해는? 한 번도 체인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다음 해는? 지난겨울은 기록적으로 따뜻했다. 추위라면 질색인 내가 이 정도 겨울이라면 얼마든지 와도 좋다고 생각했다. 기후라는 것을 이제 믿을 수 없다. 그런 세상이 됐다. 그러니까 4월이 이렇게 추운 것도 이상하지 않다. 


추위는 여전히 질색이지만, 거실에서는 치운 라디에이터를 책상 아래에 두고 약하게 튼 채 진토닉을 홀짝이면서 보내는 봄날의 밤은 나쁘지 않다. 얼음을 씹어 먹느라 식은 몸을 라디에이터에 데우며 일기를 쓴다. 며칠 전에는 어마어마한 강풍이 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바람 소리가 무서워 몇 번이고 창밖을 내다 봤다. 내다본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일종의 습관이다.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보다 보면 동료와 눈이 마주치고, 그러면 괜히 안심한다. 나만 불안한 거 아니지? 응, 나도 그래. 


그런 날 뛰었다. 요즘 회사 동료 셋과 점심 러닝을 한다. 클럽 이름은 산방 러너스. 산방산은 회사가 있는 동네 사계리의 랜드마크다. 리효리는 거꾸로 해도 리효리, 산방산은 거꾸로 해도 산방산에서 영감을 받아 캐치 프레이즈는 런 산방산 런. 우리는 늘 산방산을 보며 런-한다. 신기한 게 바람을 등지고 뛰면 소리로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 귓등으로 맞는 바람은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 그러던 게 방향을 바꿔 바람을 마주하고 뛰면 일순간에 세상 종말의 날처럼 시끄럽다. 너도 알 텐데. 제주는 바람의 섬인 거. 그런 느낌으로 바람의 존재감이 엄청나다. 아무튼 그런 날 뛰었다. 와, 맞바람 맞으면서 뛰니까 속도가 확실히 느려졌어요. 그쵸. 진짜 그러네요.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는데 그러면서 뛰었다.


그 바람이 밤에는 잦아들었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산책을 갈 때는 바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걷기 좋은 밤이었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날도 따뜻했다. 우리는 해변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남편이 나에게 글을 쓰라고 했다. 두 번째 책은 일기가 좋겠다고 했다. 나는 요즘 읽는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 얘기를 했다. 일종의 반론이다. 에세이스트란 이런 사람들이지. 일기 같은 건 안 되고 차라리 뭔가 질문을 찾아야 해. 나는 내 글이 특징이 없다고 생각하고 결혼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명확하고 간절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반론으로 시작한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 이야기는 한참 이어졌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남편에게 읽은 책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만큼 길게 하곤 한다. 그 얘기는 아주 오래 이어지기 때문에--이를테면 우리의 산책 시간이 대략 50분 가량인데 그중 40분 정도--남편은 가끔 언제 끝나냐고 물어본다. 그날은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진 않았고 그게 고무적이라 나는 약간 상기된 마무리 후에 물어보았다. 죽이지? 쩔지? 어떻게 그런 글을 쓰지? 뭐, 확실히 이야기꾼이긴 하네. 남편의 반응은 언제나 미적지근하다. 나는 아주 자주 빠르게 감탄하고, 그는 나의 빠르고 너무 잦은 감탄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는 내가 계속 책을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계속 반대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대체로 반대하는 편이고 특히나 이런 주제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그로부터 결정적인 확신을 얻기 위해 끝까지 반대한다. 왜? 내 얘기는 재미없는데. 완전 평범한데. 내가 왜 써야 되는데? 나에게 할 질문을 그에게 한다. 내가 나에게는 해주지 못할 답을 그가 해주기를 바라면서 어깃장을 놓는다. 네 글은 신중하거든.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신중하거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에 뒷통수가 띵하다. 아니, 나는 아주 즉자적인데. 완전 안 신중하고 섣부른데.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격하지만 남편은 이길 수가 없다. 응, 알지. 근데 글은 그렇게 안 쓰잖아. 


듣고 보니 그렇다. 어쩌면 내 글은 현실의 나에 대한 반작용이다. 나는 나의 글에 대한 그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회사에서는 큰 사고를 한 건 쳤다. 하지만 대표님은 주의를 준 것 외엔 통 크게 넘어가 주셨고, 나는 무사히 집에 왔다. 다만 최근 들떠 있던 기분이 착 가라 앉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고 정신이 좀 드는 기분. J 선배는 마감 때 유독 날이 서 있는데 이렇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였나. 술을 줄이고 덜 들뜨면서 아직 쌀쌀한 4월을 날 것, 남은 봄을 보내는 나의 미션이다. 여름이 오면 어김 없이 들뜨고 말 테니까. 그리고 그건 어쩔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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