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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Feb 15. 2020

택시를 탔다. 내가 사는 아파트 이름을 대자 기사님이 대뜸 말한다.

    

“아 그 후진 아파트요?”     


내가 사는 공간을 후지다고 말하는 기사님의 표현에 당황했다. 기어이 그동안 내가 살았던 공간들이 떠오르고 말았다.     


태어난 이후부터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허름한 집에 살았다. 인생 전반이 불운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그때의 집과 가난을 곱씹기엔 울컥거리는 무언가가 자꾸 걸려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에피소드. 학창 시절 꽤 시청률이 높았던 예능프로그램 중 하나는 허름한 집을 새집처럼 고쳐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유명한 건축가와 신동엽이 진행자였다. 아마 나와 같은 시기를 보냈다면 새로운 집이 공개될 때마다 나오는 BGM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고쳐준 집은 입이 뜨악 벌어질정도로 멋있었고 각종 가전제품과 가구들도 선물로 주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나도 언젠가 내가 살게 될지도 모르는 새집을 마구 상상했다.     


어느 날 우리학교에 그 프로그램에 출연할만한 출연자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를 추천해주었고 선생님이 나를 불러 나의 의사를 물어봤다. 며칠을 고민하다 아빠에게 물어봤다. 아빠는 단번에 거절했다. 나는 그 거절이 싫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싫은 이유는 깨끗하고 멋진 집에 살고 싶은 욕망이었다. 싫지 않은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TV에 나와 내가 이런 곳에 살고 있다고 까발리고 싶지도 동정받고 싶지도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집에 살기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관왕이나 한 것에 대해 온 나라가 들썩이지만 비 오는 날 끊임없는 계단을 내려와야만 도달하는 지하방에 사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이 현상이 나는 X나 이상하다. 나는 그 영화를 볼 때, 기택의 가족이 꼭 나인 것만 같아서 캄캄한 영화관에서도 얼굴이 발개졌는데 사람들은 허울 좋게 ‘계급’이라는 말만 붙여놓고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대낀다. 심지어 지금은 기뻐하느라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반지하가 상품으로 읽히는 시대라니. 아무튼 <기생충>의 반지하방에 사는 그 가족이 바로 나였다.      


그 후로 우리는 외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오래된 시골집이지만 깔끔하고 단정했다.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 좋았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자가 되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느라 집보다 밖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다시 정착할 즈음 서울로 왔다. 혼자 살 집을 구할 형편이 못되어 수원 친척집에 2년 정도를 얹혀살았다. 대단지의 아파트였다. 마당이 없는 것은 답답했지만 모든 것이 편했다. 따뜻한 물이 수시로 나오고 필요한 모든 편의시설이 지척에 있었다. 영등포에 취업이 되면서 출퇴근이 고되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돈이 오백만원 정도 모였을 때 대림동에 옥탑방을 구했다. 보증금 오백만원에 월세가 28만원.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알아본 다른 옥탑이나 반지하의 시세보다도 훨씬 저렴했다. 바로 뒤가 초등학교라 시야가 탁 트여있어서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옥탑을 너무 좋아했다. 옥상 화분에 상추와 피망과 고추와 토마토를 길렀고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삼겹살 파티도 했고 영화제도 열었다. 일에 지쳐 돌아온 날이면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옥상으로 갔다. 옥상에 누워서 쳐다보는 달은 큰 위로가 되었다. 도대체 서울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는지, 빨간 십자가를 세어보기도 하고 거대하게 솟아난 아파트 단지를 보며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외치기도 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옥탑으로 초대했을 때 그들은 나의 생활을 걱정했다. 적은 월급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짜리 옥탑. 세탁기를 넣고나니 겨우 몸이 들어가는 화장실. 그들의 걱정이 이해는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겨울이면 현관문이 하얗게 변했다. 손을 갖다 대면 얼음이 사르르 녹았다. 열쇠 말고는 특별한 안전장치가 없어서 단 한 번도 혼자서 배달음식을 시켜먹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만 빼면 다 좋았다.     


나의 주거환경은 점점 나아졌다. 결혼을 하면서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었다. 1969년에 지어진,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오래된 아파트. 엘리베이터도 없고 작지만 나는 이 아파트를 좋아한다. 봄이면 관리실 지붕 위에 피는 장미도 좋아하고 오래된 아파트 간판도 멋스러워서 좋다. 매달 전기검침원이 와서 직접 전기사용량을 적어가고 수도검침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오래된 아파트. 집 밖에서도 휴대폰에 대고 말만 하면 불도 켜주고 난방도 켜주는 아파트는 아니지만 나는 이 아파트가 좋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이 아파트를 후진 아파트라고 하니 충격일 수밖에. 태어날 때와 비교하면 나의 주거환경이 눈이 부시게 좋아졌는데 아직까지도 어떤 이들에겐 내가 사는 집이 그렇게만 보이나 보다. 아주 조금 자존감이 떨어질 뻔하다가 어이가 없어져버렸다.  집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도 그 기사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나의 주거환경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거대하게 솟아오른 수억 원대의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내가 살았던 허름한 집의 초상이 보인다.


하루에 아파트값이 천만원이 오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억울한 사람도 많고 호재를 부르는 사람도 많은 이 혼란함 속에서 나는 어지럽다. 사회를 탁월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난독증 탓일까. 어떤 이들은 몸 하나 겨우 누울 자리에 월세 22만원을 주며 사는데 어떤 이들에겐 이마저도 비즈니스다. (참고 : 한국일보 기사 )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주거마저 자본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집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불평등한 것이 되어버렸는데 너무 당연해서 어느 누구도 이 기형적인 구조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단순히 예능이나 영화에 존재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리얼리티다. 왜 이런 불평등은 예술의 주제에서 정치나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것일까.


후진 건 나도, 내 집도 아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야말로 정말 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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