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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Jan 05. 2020

급식의 추억

급식 먹고 쑥쑥 자라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뜻밖의 협박을 받았다.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진 채 집으로 달려갔고 엄마를 찾아 울었다. 난 영원히 5학년이라고.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학교도 가지 못할 거라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울었다.     


교육제도가 바뀌면서 어수선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나는 국민학교를 3년, 초등학교를 3년 다녔다. 4학년이 되면서부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급식실도 곧 새로 생겼다. 학교에서 밥을 준다니. 겨울이면 무거운 보온 도시락통을 들고 다니던 학생들에게도, 어떤 반찬을 싸줘야 하는지 매번 고민하는 엄마들에게도 급식실은 환영받았다. 급식실은 밥만 먹는 공간이 아니었다. 졸업식이나 각종 강의와 행사, 심지어 비가 오는 날 행사도 도맡아 열리는 곳이 되었다. 급식실은 오랫동안 우리 학교의 자랑이 되었고 졸업식 날에는 졸업장과 꽃다발을 들고 급식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리고, 교실 앞 게시판에는 급식비를 제 때에 내지 못한 학생들의 명단이 붙게 되었다. 내 이름도 거의 붙어있었다. 우리 엄마도 스쿨뱅킹을 신청했지만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보다 내가 직접 행정실에 가서 납부하는 날이 더 많았다.      


5학년 겨울, 그때. 행정실장님은 어린 나에게 말했다. 급식비를 내지 않으면 6학년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당연히 졸업도 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그 말이 어린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아서 폭풍처럼 울었다. 며칠 내내 엄마를 들볶았다. 아침저녁으로 엄마에게 급식비를 냈는지 물어봤다. 며칠 뒤 어디에서 돈을 마련한 엄마가 나에게 몇 개월치 급식비를 손에 쥐어줬고 나는 학교에 가자마자 행정실로 달려갔다. 세 칸으로 나뉜 영수증의 한쪽을 받고서야 안도했다.


나는 이제 6학년도 될 수 있고 졸업도 할 수 있다. 오예, 마음속으로 두 발을 동동거리며 춤췄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실 앞 게시판에 미납자 명단이 나올 때마다 초조한 마음으로 엄마를 닦달했다. 다행히 졸업하지 못한다는 협박 없이 졸업할 수는 있었지만 매달 급식비 때문 불안했다. 나의 불안함과 창피함만큼이나 급식비를 제 때 내주지 못한 엄마의 마음도 결코 쉽지는 않았으리라.     


중학교도 가게 되었고 고등학교도 가게 되었지만 급식비를 제때에 내지 못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어쩌다 스쿨뱅킹으로 급식비가 빠져나가 미납자 명단에서 빠진 적은 있었지만 가끔이었다. 자식의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나이가 되자 매번 미납 상황을 말하기가 민망해 눈치껏 집에 돈이 돈다 싶을 때 말하기도 했다. 교실 앞 게시판에 내 이름이 적힌 미납자 명단은 창피했지만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눈치도 마음도 자라서,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졸업시켜주지 않을거란 협박에 펑펑 울지도 않았다. 그런 말을 그대로 부모에게 전하지도 않았다. 밀린 급식비를 나 몰라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졸업은 할 수 있을거란걸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제 때에 급식비를 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급식을 매우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4교시가 끝날 즈음, 한 쪽발을 책상 밖으로 빼어놓고 종만 치면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조금 뻔뻔해지는게 내가 선택한 생존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당근과 생선을 싫어해서 남긴 적도 있지만 급식시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급식 메뉴는 나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나는 늘 맛있게 먹었고 그럴 수 있다면 두 번 먹었다. 급식이 피와 살이 되어 나는 쑥쑥 자랐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지 십오년이 지났지만 종종 떠오른다. 느리지만 세상은 조금씩 좋아져서 무상급식제도가 생겨났다. 무상급식 제도가 시행되기까지 치열한 어른들의 논의의 과정에서 나처럼 상처 받는 학생들의 얼굴이 보였다. 급식을 먹을 때마다 카드로 태깅을 해야 하는데 급식비를 내지 않으면 빨간불이 들어온다는 어떤 뉴스는 충격이었다.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내가 급식비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니. 밥 한술이 제대로 들어가기나 할까. 나에게 급식비를 독촉하던 행정실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나에겐 분명 상처가 되었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 협박이 아주 협박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으리라.


이제는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한 듯 보였다. 속사정도 모르고 급식비를 안 냈다고 빨간불을 켜는 기계의 마음은 얼마나 척박한가.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힘이, 기계에겐 없다. 다행히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밥만은 제대로 먹이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상급식의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 ‘밥 먹었니?’가 인사가 되는, 밥의 중요함을 공유한 우리 사회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급식비를 내지 못해 창피하거나 곤란한 경험을 지금의 학생들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그러나 ‘밥은 굶기지 말자’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에게 당도하는 것은 아니다. 공교육을 떠난 학교 밖 청소년들은 이 논의의 바깥에서 겨우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방학기간의 가난한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밥과 김치를 입으로 밀어 넣으며 눈치도 함께 먹으며 자라는 것은 아닌지 정책의 선택권을 갖고있는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2020년에도 모두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도 눈칫밥 먹지 말고. 모두가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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