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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Jun 20. 2020

첫 출근의 기록

오늘의 고민이 쓸모없는 고민이 될 날이 오기를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신입연수 마지막 날.


2주가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 말도 놓으며 정든 동기들과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고, 각자의 팀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는 한 방에서 잔뜩 긴장한 채, 앞으로 함께 일할 팀원분이 본인을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명 한 명 동기들이 떠나가고 홀로 남아있는 나에게도 마침내, 앞으로 내 사수가 되어주실 팀원분이 나타났다. 


사수님을 뒤따라 도착한 낯선 공간을 가득 채운 낯선 사람들, 그리고 아직은 낯설기만 한 나의 책상과 그 위에 놓여있는 노트북. 먼저 취업한 친구가 회사에서 지급받았다며 보여준 그 노트북과 똑같은 기종이다. 대학 입학 전에 샀던 노트북과 이제는 이별해도 될 것 같다. 이력서와 자소서로 바탕화면이 빼곡히 찬, 나의 대학 시절과 취준 시절을 함께한 고물 노트북아, 이제는 안녕. 


출근 첫 임무는 업무기기 세팅이었다. 

"매뉴얼 보고 사내망 연결할 수 있죠?"라고 물어보는 사수님께 "네!"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명색이 IT회사인데 인터넷 연결조차 못하면 그것 참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닌가. 그 후로 몇십 분 간 '사수님께 여쭤볼까, 말까' 하는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경험하고, 결국 한 번 도움을 청한 후에야 간신히 업무기기 세팅을 마쳤다.

속으로는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긴장하지 않은 척 애써서인지, 첫 출근이랍시고 신경 써 입은 빨간 스웨터는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바쁘게 일하는 가운데, 나만 한가롭게 업무 문서를 읽다 보니 어느새 다가온 퇴근 시간. 그러나 그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그 누구도 나에게 이만 퇴근해보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으니, 그때부터 두 번째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오늘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 텐데, 왜 아무도 퇴근하라고 안 하지?'

'그래도 출근 첫날이면 보통 먼저 들어가 보라고 하지 않나? 그냥 알아서 인사드리고 가야 하나?' 

그렇게 10분이 지난 후에야 먼저 가보라는 사수님의 한 마디 덕분에 주춤주춤 1등으로 퇴근했다.


내일은 퇴근시간에 알아서 일어나면 될지, 아니면 내일도 눈치 보며 가보라 하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첫 퇴근길. 

시간이 흐른 후에는 오늘의 심각한 이 고민도, 쓸모없는 고민이 되어버리겠지. 

어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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