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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Jun 28. 2020

승부욕

어제의 나를 이기는 것으로 충분해

입사한 지 72일째.

팀장님과 정식으로는 처음 1:1 면담이 있는 날이다.


이제 2개월 정도 일해보니 어떤지, 재미는 있는지, 힘든 점이나 고민은 없는지,

이런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질문을 받았고, 아마 팀장님도 충분히 예상하셨을 그런 대답을 했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나 받았는데, 나는 승부욕이 있는 편이냐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는 있지만 강한 편은 아닌 것 같다는 다소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팀장님은 나보다 6개월 먼저 입사한 K님 이야기를 꺼냈다.

K님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함께 일해보니 엄청 승부욕이 강한 것 같다고.

팀장님이 나와는 직접적으로 일해보지 않아서, 나는 어떨지 궁금했다고 하셨다.


입사하고 2주가 채 되지 않았을 때 "K님 보고 자극 받아서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한번 들었던 터였지만,

다시 한번, 음, 저는 K님 만큼 승부욕 강한 편은 아닌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면담은 이후로도 한 시간 가량 계속 이어졌지만, 퇴근하는 내내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은 "승부욕이 있는 편이에요?"라는 질문뿐이었다.


그 질문을 던진 팀장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지, 어떤 대답을 원하셨을지 생각했다.

다들 신입은 패기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니, 마찬가지로 승부욕 강한 신입을 더 좋아하겠지.

무엇보다 팀장님 자체가 승부욕 있는 사람인 것 같고.

그럼 내가 대답을 잘못한 건가? 승부욕이 없는 편은 아니니까, 그냥 승부욕 있다고만 할 걸 그랬나.

약간 후회를 하다가 이내,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승부욕이 없었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전교 등수 하나만 밀려도 집에 돌아와 울던 중학생 시절의 나는

전교 등수는 체념하고 반 등수 올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등수? 그게 뭐지. 그저 잘난 저들과 같은 대학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했던 대학시절을 거쳐,

4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회사에 간절한 마음으로 자소서를 써내는 취준생 시절을 지나,

이렇게 평범한 직장인이 된 지 72일째에 접어든 거다.


수많은 시험, 입시, 그리고 취업까지 계속되었던 무한한 경쟁 속에서,

어떤 승부에서든 내가 수십 명, 수백 명을 이겼다 한들, 결코 모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일까.

어제의 나를 이기는 것조차 힘든 오늘인데, 나보다도 더 모르겠는 다른 무언가를 이기는 게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겼다'는 결과보다는 '해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기지 않더라도 겨룰 수 있는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때로는 져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항상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지는 나 자신을 못 미더워했던, 나에게.


물론 오늘의 게으른 나는 내일의 내가 이겨줬으면 좋겠다.

이미 어제의 나에게는 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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