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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Jul 19. 2020

신입이 좋은 사수를 만난다는 것

사수님의 오른팔이 되겠어요

신입일기_202일째

사회초년생인 또래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종종 "네 사수는 어때?"라는 질문을 받는다. 직장생활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두 가지가 '일이 즐거운지', 그리고 '사람들이 좋은지'라고 했을 때, 신입에게 있어 '사람들이 좋은지'를 좌우하는 가장 큰 존재는 사수가 아닐까. 신입으로서 좋은 사수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잘 알고 있기에,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사수가 된다면 그 행운을 물려주고 싶어서 남기는 기록.




사수님은 내가 어떤 실수를 하건 그 실수만을 지적할 뿐, 나라는 사람을 질책하지 않는다.


사수님이 부재했던 어느 날, 회의록에는 지난 주에 이미 논의했던 안건이 아직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다른 분이 "지난 안건은 미리미리 지워야죠."라는, 야단도 꾸중도 아닌 한 마디를 하셨는데, 내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던 그때의 나는 그 한 마디가 어찌나 따끔했던지. 그 순간 사수님이 보고 싶었더란다. '사수님이었으면 "지난 안건은 미리미리 지워주세요."라고 하셨을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지난 안건은 미리미리 지워야죠."라는 한 마디에서는 내가 당연한 일을 안 했다는 듯한 질책이 느껴졌다. 아마 그래서 뜨끔했을 거다. "지워야지" 대신 "지워주세요"라고 했다면 요청으로 들릴 뿐, 나를 질책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처럼, 같은 의미라면 더 따뜻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은 사수님이 요청한 업무에서 죄송스러울 정도로 같은 실수를 반복한 적이 있다. 사람에 따라 "또 틀렸네요, 다시 수정해주세요."라며 은근슬쩍 질책할 수도 있고, "말귀 못 알아들어요? 다시 수정해주세요."라고 대놓고 뭐라 했을 수도 있었던 상황인데, 사수님은 더도 덜도 말고 "다시 수정해주세요."라고만 하셨다. 언젠가 내가 뭔가를 지적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사람이 아닌 실수만 담백하게 지적할 수 있었으면.




여느 신입사원들처럼, 사수님을 보조하는 업무를 주로 했다. 밑에서부터 일을 배워나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가 쓸만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내야 할 것 같고, 또 하루빨리 '일다운 일'을 맡고 싶다는 욕심이 한가득이던 그땐, 뒤에서 눈에 띄지 않는 일만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로 인한 불만이나 불안감보다는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해낸 작은 일도 대신 생색 내주는 사수님 덕분이었다.


대만에서는 잘 사용하고 있는 기능이, 본사가 있는 일본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될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사수님께 떨어진 미션은 대만에서 이 기능을 사용하는 프로덕트를 판매해서 얻는 매출이 이만큼이나 되니 기능을 유지해달라고 설득하는 것이었고, 나에게 떨어진 미션은 그 매출을 계산하기 위한 로우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시간은 꽤나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결과는 좋았다. 사수님은 성공적으로 일본팀을 설득시켜 존폐 될 위기에 처했던 기능을 구할 수 있었고, 팀장님은 사수님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팀 단체 채팅방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가 사수님께 고생하셨다고 한 마디씩 하는데, 나의 티 나지 않은 고생은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 조금은 서운했다. 그런데 그 서운한 마음을 사르르 녹여버린 것은 "안뉴님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라고 한 마디 덧붙인 사수님의 답장이었다. 내가 한 작업이 도움이 되었으면 얼마나 되었겠냐만은, 많이 도와줬다고 대신 생색 내주던 사수님. 신입 시절 내가 뒤에서 한 일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저도 이만큼 했어요!"라고는 티 내지 못하는 나 대신 티를 팍팍 내주신 사수님. 덕분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마움은 아끼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도 사수님에게서 배웠다. 사수님은 내게 쉬운 일 하나를 시키더라도 끝에는 항상 "감사합니다~"를 덧붙이고, 내가 그 쉬운 일을 하나 완료했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를 덧붙이시는데, 그 다섯 글자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나에게 일을 시킨다는 느낌보다는 일을 부탁한다는 느낌을 주고, 내가 한 사소한 일이 별 것 아닌 게 아닌 가치 있는 일이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국가의 사업을 담당하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다. 작은 일에도 항상 "Thank you"라고 해주는 담당자가 있는 국가에는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은데, 어려운 일을 해줘도 무반응이거나 이모티콘 하나 보내는 담당자가 있는 국가에는 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게 사람 마음이랄까.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고맙다는 표현은 아끼지 말아야겠다.




요즘 업무부담이 많아져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사수님께 내가 느낀 고마움만큼 많은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지만, 상반기를 마무리하며 가진 워크숍에서 나는 "이번 상반기에 사수님의 오른팔이 되어드리는 것이 목표였는데, 모르는 것도 많고 실수도 하고 그래서 두 손가락 정도의 역할밖에 못한 것 같아요. 하반기에는 온전한 팔 하나의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었다.


그렇게 워크숍이 끝나고 돌아온 월요일, 책상에는 사수님이 느지막이 준비하신 나의 생일선물과 손편지가 놓여 있었으니,

상반기는 '두 손가락'이 아닌 나의 반쪽만큼 큰 존재였다는 걸 알아줘요-!
하반기도 잘 부탁하고, 더 즐겁게 일해 보아요! 다시 한번 생축!


라는 따뜻한 한 마디에, 또 한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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