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비스기획팀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IT회사에 다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서비스기획자 보니까 로그인일 경우, 비로그인일 경우 등등 모든 경우 다 따져서 이럴 땐 저렇게, 저럴 땐 저렇게, 온갖 케이스를 다 짜던데. 너도 그런 거 하는 거야? 나는 그거 도저히 못 하겠던데."
맞아, 친구야. 내 일이 바로 그런 거 하는 거야.
하루는 엄마가 휴대폰을 들고 오셨다. 자동 로그인 상태로 쓰시던 어플이 리뉴얼되는 바람에 재로그인을 해야 하는데, 새로 바뀐 화면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셨기 때문.
엄마: 아니, 잘 쓰던 걸 불편하게 왜 자꾸 바꾸는 거야~ 쓸데없이.
나: 엄마... 내가 하는 일이 그런 거야...
엄마: 네가 하는 일이 이런 거야?!! 세상에...
네, 엄마 딸내미가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서비스기획자, 프로덕트 매니저라는 직업은 생소할 것이다. 나도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런 직무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스마트폰에 있는 어플이나 웹사이트를 '만드는 일'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개발자가 된 거냐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아니, 개발자는 아니고 개발자랑 같이 일해. 내가 이런 기능을 넣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 하고 기획을 해가면 디자이너가 디자인하고 개발자가 개발해서 만드는 거야."
서비스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모두 크게 보면 '프로덕션(production)' 직군에 속한다. 앱이든 웹이든, 우리가 담당하는 프로덕트(product), 즉,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신규 서비스를 새로 기획해서 출시하는 경우보다는 기존 서비스에 기능을 추가하고 수정하며 개선해 가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엄마가 왜 하는지 모르겠다던 리뉴얼을 감행하기도 하고, 반대로 열심히 운영해 오던 서비스를 종료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서비스기획자는 '기획'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개발 빼고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유관부서로부터 전달받은 요구사항을 취합하는 일,
요구사항 간의 우선순위와 일정을 정리하는 일,
그 요구사항을 서비스에 어떻게 반영할지 기획서를 쓰는 일,
서비스의 정책을 정하는 일,
와이어프레임을 그리는 일,
화면에 들어갈 문구를 쓰는 일,
기능 구현 방법을 검토하는 일,
문제없을지 보안팀 및 법무팀과 검토하는 일,
변경사항에 대해 사용자들에게 알리는 일,
서비스가 정상적으로 동작하는지 테스트하는 일,
고객문의(CS)에 대응하는 일,
데이터를 설계하고 뽑고 분석하는 일,
이 모든 걸 시작하고 마칠 때 보고하는 일,
이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조율하는 일.
결국 서비스기획자는 이 서비스가 잘 굴러가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일을 하다 보면 특정 부서의 업무라고 하기 애매한 그레이존(gray zone)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 애매한 일들은 모두 서비스기획자의 몫이 된다. 서비스가 굴러가는 데 방해가 되는 돌부리를 치우고, 구멍을 메우는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우리끼리는 서비스기획자를 '잡부'라고 자조하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제너럴리스트'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커리어를 제대로 쌓으려면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넓고 얕게 아는 제너럴리스트는 대체 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서비스기획이라는 게 누구나 할 수 있을진 몰라도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들과 협업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보다 잘 아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을 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