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반죽 만지작 거리며 멍 때리기
백수의 시간은 한가롭게 흘러간다.
직장인 시절에는 평행선 상에 놓여있던 주중과 주말이 같은 선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급기야 오늘이 주중인지 주말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백수로 거듭난다.
백수의 삶은 다음과 같은 장점들이 있었다.
남들이 회사로 출근할 때 공원으로 출근한다.
은행이나 우체국 마감시간에 쪼들릴 필요가 없다.
영화관이 내 것인 양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자리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묵혀뒀던 벽돌 책을 돌파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취향과 관심사, 취미가 깨어난다.
어린 시절 내가 다니던 유치원은 매주 요리 시간이 있었다. 이때 만드는 요리는 먹기보단 놀기 위한 요리에 가까웠다. 옥수수로 팝콘을 튀기거나 좋아하는 재료를 쌓아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밀가루 반죽을 조물딱 거리며 기상천외한 모양의 쿠키를 만드는 식이었다.
원래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요리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즈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꼬마 요리사’는 ‘만들어 볼까요’와 함께 그 시절 내가 빠짐없이 챙겨보던 프로그램이었다. 꼬맹이 시절의 나는 분명 요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요리는 귀찮고 피곤한 일이 되어있었다. 살기 위해 끼니를 챙기기 위한 수단. 나보단 남이 해주는 게 좋은 그런 것.
빈틈없이 꽉 채워진 삶의 레이스는 어린날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든다. 미래에 울창한 숲이 될지 모를 수많은 어린 씨앗들은 햇빛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땅 속 깊이 잠들어 잊힌다.
백수의 여유는 종종 잠들어 있던 어린 시절의 감성을 일깨운다. 문득 아무 걱정 없던 그때처럼 반죽을 만지작 거리며 맛있는 걸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부드럽고 쫀득거리는 것엔 묘한 중독성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때마침 집에 제철 맞은 여름 감자가 가득했다. 감자가 지닌 본연의 전분은 밀가루 없이도 쫀득한 반죽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감자만 있으면 화덕에 구운 것 같은 노릇노릇한 피자도 만들 수 있다.
감자 3개, 닭가슴살 소시지 1개, 양파 1/2, 당근 70g, 모차렐라 치즈 80g, 타피오카 전분 3큰술(감자나 옥수수 전분 등으로 대체 가능), 소금 1 티스푼, 토마토케첩 1큰술 (저당도 케첩 추천), 올리브유
감자 반죽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감자 특유의 포슬 거림이 있긴 하지만 찰기만큼은 밀가루 반죽 못지않았다. 멍 때리며 따뜻한 감자 반죽을 만지작 거리자니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이거 재미있는데?
잔뜩 재미가 올라 반죽을 치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손 끝을 스쳤다. 기분 좋게 만든 요리는 맛도 좋다. 손맛이라는 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예상대로 세상 맛있는 감자 피자가 완성되었다. 노릇노릇 겉모양만 보면 화덕에 구웠다고 해도 믿을만한 비주얼. 겉은 바삭, 속은 쫄깃쫄깃! 쭈욱 늘어나는 치즈에 사정없이 빠져들어 피자 한 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디 치즈는 감자와 궁합이 좋다. 감자에 부족한 단백질과 지방을 치즈가 보충해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양파와 당근, 닭가슴살 소시지까지 넣었으니 영양만점 완벽한 한 끼 식사다.
백수의 한가로움이 내게 준 큰 깨달음이 있다. 삶은 생각보다 다양한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돈을 벌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리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 한 권의 책, 작은 취미생활, 자잘한 추억과 경험들, 무수한 사람들과의 작은 인연... 크고 작은 단위의 순간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삶이 완성된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점묘화 같다.
그러니 잘 살기 위해선 커다란 목표보단 작은 감각들을 깨우는 편이 낫다. 그날은 오후 내내 감자 반죽을 주물럭 대며 기분 좋게 멍 때렸다.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좋았던 기억도 소환했다. 이만하면 더 예쁜 그림으로 완성시킬 점 하나는 찍었으려나.
*자세한 요리 과정은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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