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공감하기
나는 꽤 오랫동안 긴 머리였다.
묶고 땋는걸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긴 머리가 무난하고 관리하기 편해서다.
머리가 뻗칠 걱정할 필요도 없고
혹시라도 뻗치거나 묶은 자국이 남으면 그냥 당고머리로 정수리에 폭 올려주면 된다.
드라이도 고데기도 잘 못해서 그냥 파마로 웨이브는 해결하고
여자는 머리를 기르면 몇 배가 더 예뻐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누구라도 어울리는 머리라는 거겠지.
그런데 왜 난 단발머리를 하게 된 걸까.
지난가을,
약간의 계절성 우울증을 겪고 있던 나는 모든 일이 지겨웠고 변화가 필요했다.
나아지지 않았던 그 감정이 괜찮아 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조금 품었고,
그 당시 봤던 '마리텔'에서 차홍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맨날 똑같은 머리하고 이십 년씩 살면 무서워 보일 수 있어요. 나중에 사진첩 보면 얼마나 무섭겠어요?"
사실 이 말은 남자 머리에 해당했는데
왜 내가 찔린 건지.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묶이지도 않는 짧은 단발과 마주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은 참 좋았다.
다행히 기분이 산뜻해졌고 가벼웠고 흔하지 않아 보여 좋았다.
긴 머리의 무난했던 내가 특별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머리 감는 시간이 무척 단축되었고 말리는 시간은 더더욱 단축되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며칠 가지 않았다.
난 단발이 되면 오른쪽 머리만 바깥으로 뻗치는데,
이 문제는 현대 미용의 발달이 해결해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출근 전, 나는 머리를 빨리 말리는 만큼 드라이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잘 안되면 고데기도 꺼내고, 그리고 잘 다룰 줄 몰라 그 날은 머리도 엉망 기분도 엉망.
묶이지도 않으니 가릴 수도 없다. 하....
단발도 관리를 해야 예쁜데 관리도 잘 못하고 그냥저냥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가 친구 하잘 것 같이 촌스러워지고 있다.
잠깐의 산뜻함을 얻기 위해 얻은 결과는 생각보다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가끔 드라이 잘 되는 날에 행복해 하고
가끔 듣는 '잘 어울린다'는 말에 위안을 삼아가며 이 머리에 적응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