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낳을 때 계절도 딱 지금과 같았다. 꽃잎이 날리고 봄바람이 따뜻하게 불어올 때 나의 배도 남산만 하게 불어 있었다.
난임 병원을 다니면서 아주 어렵게 아기를 가졌고 고위험 산모인지라 동네에서 가까운 병원에서의 출산은 꿈도 꿀 수 없어 대학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대학병원의 진료는 두 시간의 기다림과 5분도 안 되는 진찰을 감내해야 한다. 가끔 주치의 선생님께서 출산에 들어가면 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정기 진료를 잘 받고 예정일이 지나도록 아이는 나올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많이 걸으면 나올까 싶어 매일 걷고 또 걸어봤지만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교수님께 유도분만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냥 기다리지, 그게 나을 텐데’ 하는 교수님의 말은 한치의 틀림이 없었다. 유도 분만이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을 출산 후에나 알았으니 말이다.
남편과 나는 둘이서 긴장하는 것도 없이 출산 가방을 싸고 유도 분만일 전날 입원을 했다. 다음날 겪을 일을 모르니 당장 금식 전까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냐가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당연히 모유 수유를 할 줄 알았으니(조리원에서 모유 수유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나라는 것도 알았다.) 매운 음식이나 차가운 음식을 출산 전에 먹어야 한다며 짬뽕과 아이스크림을 열심히도 먹었다.
유도 분만과 관련한 약물이 투입된 후에 분만일 새벽부터 이슬이 비췄다. 동시에 진통이 약하게 오고 있어서 이 정도면 견딜만하다며 멍청한 생각을 했다.
분만 대기장에 들어가서 누워 있으니 제대로 된 진통이 몰려왔다. 너무나도 아파서 아악 하는 수준의 비명이 아니라 단전에서 차오르는 우 아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 마리의 늑대가 되어 소리치고 있는 와중에 옆의 부부는 4센티가 열렸다느니 하나도 안 아프다며 아는 언니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무통 주사가 간절했다. 자궁문을 보러 간호사 선생님이 오시면 손목을 붙잡고 울었다. ‘무통 주세요.’ 엉엉 울며 말해도 아직은 아니라며 냉정하게 간호사분은 사라지셨다. 게다가 내가 진료받는 교수님은 무통을 잘 안 주시는 분으로 유명했다. 얼마나 사정을 했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마취과 선생님이 오셨다.
‘등을 새우처럼 하셔야 해요.’ 도대체 남산만 한 배를 어떻게 접어 새우등을 만들라는 건지 아픈 와중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그래도 그 무통을 맞고 싶어 나는 허리를 이렇게도 접어보고 저렇게도 접어보며 애를 썼다.
드디어 주삿바늘을 꽂았는데 갑자기 상황이 급박해졌다. 아기의 심박이 떨어지며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교수님이 달려오시고 여러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이 오시더니 분만장으로 가야 한다며 소리쳤다.
‘딜리버리! 딜리버리!’ 그렇게 정신없이 분만장으로 가서 나는 있는 힘껏 힘을 주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배를 연신 누르며 겨우 분만을 했다. 아이는 태변이 나와서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교수님께서 소아과 의사 선생님을 대기시켜 주셔서 중환자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기가 위험했다는 것도 회복장에서 입원실로 옮긴 다음에나 알았다. 들어오시는 간호사 분들마다 중환자실을 안 가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큰일이었다고 말을 하셔서 그제야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는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분만일은 5월 황금연휴와 겹쳐있어 회복실은 출산한 엄마들로 가득했다. 얼마나 아픈지 이 고통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데 엄청나게 목이 말라왔다. 분만일 전부터 금식이라 물도 마시지 못한 탓이었다. 남편보다도 오렌지주스가 더 간절했다.
출혈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입원실로 옮겨졌다. 산과 입원실은 이미 만실이어서 부인과 입원실을 겨우 잡았는데 2인실인 데다가 부인과 질환으로 입원하신 분들이 많아서 조심조심 이야기해야 했다. 게다가 자연분만은 겨우 하루만 입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이 되면 퇴원 준비를 해야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새벽에 진통을 들어가 4시간 만에 분만을 했기 때문에 다행히 퇴원 전까지 딱 하루를 입원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상태를 체크하러 온 인턴이 등을 보고는 놀랐다. 무통 주사를 놓으려고 꽂은 바늘이 아직 등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통의 천국은 맛보지도 못하고 주삿바늘은 출산까지 나와 함께 한 것이다. 아직도 억울한 추억이다.
입원실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도착했다. 출산 부위는 욱신거리고 힘껏 눌린 배는 감각이 없는데 밥은 잘도 들어갔다.
걸을 수 있는 힘도 없는데 아기를 보러 가려니 걸음이 저절로 옮겨졌다. 당시에는 내 배 속에서 사람이 나오다니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 외에는 모성애라고 할 감정은 없었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퇴원을 했다.
조리원으로 옮겨 천국을 보냈어야 했는데 나오지도 않는 모유 수유를 하고야 말겠다는 의욕이 넘쳐 통곡의 날을 보냈다. 둘째 엄마들이 왜 여유롭게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아기를 맡기고 쉬는 것을 택했는 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기적이 다시 찾아와 둘째를 갖게 된다면 조리원에서는 질리도록 잠을 아주 많이 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