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림교수 May 21. 2021

여자 박사이기로 하다.

그 어떤 것도 특별할 것 없던 보통의 학부 시절, 

그 어떤 누군가도 그러했듯 무심한 듯 기계적으로 수업을 듣고 있던 내가 있었다.  


나의 일상은 그러했다. 

기상 후 수업 시간을 확인하고 부지런히 걸어서 학교 건물에 도착하고,

수업을 듣고 나면 나는 잘 살고 있노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는 삶을 지속했다. 


그 보통의 날과 다름 없던 쨍쨍한 오후, 

진심어린 목소리와 열정으로 우리네 학생들을 

걱정하시던 지금의 은사님이 

수업 시간 도중, 

나만이 아닌 수업을 듣고 있던 우리 모두들에게 

방향 없는 삶은 가치 없다며, 언제든 상담이 필요하면 들르라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그냥 보통의 날들로 넘겨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그 목소리는 몇 일간 나를 뒤척이게 했다. 

"교수님을 찾아뵈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


"그래, 방향 없는 삶은 두려워.."


교수님을 만나뵈기로 결심했지만, 

그냥 바로 교수님 방으로 찾아가 내 삶의 방향을 논의하기에 

용기가 부족했나보다. 

그런 나였다. 

좋게 이야기하면 조심성 깊은, 나쁘게 이야기하면 자신감 없는..


결국 장문의 이메일을 쓰고 교수님의 정성스런 답장을 받은 후 

없던 용기가 생겨, 조심스레 교수님의 방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교수님, 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누군가 끌어줄 수 없는 외적환경으로나, 타고난 내성적 성격으로 비롯된 

내적환경으로나,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고 집중할 만한 여건이 못되었다. 


이런 내가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하고, 열심히 하려는 그 애살을

교수님은 가만히 들여다 보시고, 흐뭇하게 느끼셨나 보다. 


"내일부터 연구실에 나오렴, 앞으로 내 밑에서 공부도 하고 대학원 꿈도 키워보지 않겠니?"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교수님이 시켜주시니까, 나도 모르는 나를 찾은 것 같은 흥분이 감돌았다. 

교수님은 여러 무리 중에 누군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방향없이 떠도는 나에겐, 교수님의 제안은 마치 '나의 잠재력'으로 포장되어 

예전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나를 마주하게 했다. 


그 때부터 나의 기나긴 여자 박사로서의 여정이 시작된다. 

"여자 박사이기로 마음먹었다."


박사과정을 입학한 것은 아니지만, 박사 원서를 지원했던 그 단단한 순간조차도

지금 이 순간의 결의 이상은 아니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단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출발점은 내 자발적 의지가 아닌, 그 공간에서 교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Prologue


앞으로 풀어나갈, 

나의 여자 박사 생활기의 끝자락은

'교수'가 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나의 이야기는 결론적으로 성공한 어느 여성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시작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볼품없었고, 그 과정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내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포장될 수 있는 지금의 이 과정이 

지극히 평범하고, 찌질하고, 억울하고 멋없어 보일지라도 

나와 같은 '길'을 가기로 마음 먹은 박사 과정생들에게, 좁게는 여자 박사 과정 사람들에게 

옆집 교수 언니로서 많은 공감과 용기를 주고, 그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싶다.

쨍쨍했던 그 날, 우리 은사님이 나에게 주셨던 그 따뜻함처럼 말이다. 


금요일 밤, 유난스럽게 학계에서 반기지도 않는 이런 글을 써내려가는 이유는

내 인생의 목표가 유명한 교수가 되기보다,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를 더 깊숙하게 알아가고 실험하는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